[외신종합] 필리핀교회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이 대거 참여한 반(反)부패 집회가 9월 21일 마닐라에서 열렸다. 집회에는 수만 명이 운집했다.
이번 집회와 전국적인 항의 행동은 올해 7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이 홍수 방지 공사에서 드러난 부정 프로젝트들을 폭로하고 기소하겠다고 공언한 데서 촉발됐다. 태풍과 몬순 기후에 취약한 섬나라 필리핀의 홍수 방지 사업이 심각한 부패로 얼룩졌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필리핀 국민은 정부가 돈을 갈취한 것에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95억 달러 규모의 약 1만 건의 홍수 방지 프로젝트 중 상당수가 부실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은 9월 15일 기자회견에서 국민에게 평화적인 시위를 당부하며, “대통령이 아니라면 나도 거리 행진에 나섰을 것”이라고 말했다.
필리핀 주교회의 의장 파블로 비르질리오 다비드 추기경과 교회 지도자들도 9월 21일 신자들에게 시위 참가를 독려했다. 이날 시위대는 마닐라 도심 ‘평화의 여왕 성모 마리아 성지’에 모였으며, 시위에는 가톨릭뿐 아니라 개신교와 무슬림 지도자들도 함께했다.
무릎이 좋지 않아 지팡이를 짚고 무대에 오른 다비드 추기경은 “이 지팡이는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작은 양들을 구하기 위한 갈고리”라며 “부패의 낭떠러지에 빠진 이들이 많지만, 회개할 수 있다면 교회는 진실을 말할 용기를 가진 이들에게 피난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군중이 “부패한 자들, 지금 당장 감옥으로!”라고 외치자, 다비드 추기경은 “이 지팡이는 또한 백성의 돈을 낭비한 들개와 악어들을 치는 데에도 쓰일 수 있다”면서 “우리는 진정성 있는 깊은 쇄신을 원하지만 평화롭게 해야 하고, 이것은 정치가 아니라 부패한 문화와 싸우는 우리의 신앙을 하나로 모으는 도덕적 선언”이라고 강조했다.
필리핀 주교회의와 가톨릭 주요 인사들의 소셜 미디어에는 “나라가 먼저다. 부패를 근절하라”, “도둑질하지 말라”와 같은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든 신학생과 수도자들의 모습이 공유되기도 했다.
집회에 앞서 전 주교회의 의장이자 링가옌-다구판대교구장인 소크라테스 빌레가스 대주교도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신자들에게 “검증된 부패 정치인, 심지어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을 계속 선출하는 행위, 그리고 표를 대가로 돈이나 식료품을 받는 행위 자체가 ‘부패의 문화(The Culture of Corruption)’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항(Revolt)”이라며 “부패한 제도뿐 아니라, 부패를 방관하는 우리 안의 부패한 마음과 영혼에도 맞서야 한다”고 호소했다.
빌레가스 대주교는 또 “우리 안의 부패에 분노하지 않는다면 이번 집회는 ‘우리도 한몫 나누자’라는 외침으로 끝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며 “정직한 정치인을 뽑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국민이 정치인을 지속적으로 감시해 정직하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