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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칼럼] 교황에게 다가온 ‘제리 맥과이어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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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개봉한 영화 <제리 맥과이어(Jerry Maguire)> 초반부에 주인공은 성공한 스포츠 에이전트로서 양심의 위기를 겪는다. 그는 자신이 지나치게 돈과 성과 중심으로 일하다 보니, 정작 중요한 선수들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밤새워 한 문서를 작성하는데, 그것을 ‘사명 선언문(Mission Statement)’이라 부르며 제목을 「우리가 생각하지만 말하지 않는 것들(The Things We Think and Do Not Say)」 이라고 붙인다. 하지만 그 문서가 돌자마자 그는 해고당하고, 영화의 나머지 이야기는 그가 세운 이상을 지켜내려 분투하는 과정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선언문의 제목은 단지 스포츠 매니지먼트에만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상 모든 직업과 산업, 그리고 사회의 모든 영역에는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는 주제가 존재한다. 그것이 틀리거나 공격적이어서가 아니라, 정치적 맥락 때문에 금기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지만 말하지 않는 것들’을 공개적으로 말하려면 - 용기, 자신감 그리고 비난을 감수할 차분함 - 이 세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최근 레오 14세 교황이 크럭스(Crux)의 기자 엘리스 앤 앨런(Elise Ann Allen)과 가진 장시간 인터뷰는, ‘제리 맥과이어의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해온 일과 살아온 방식이 과연 옳았는지를 근본적으로 되묻는 결정적 순간이라는 점에서다. 이 인터뷰는 「레오 14세: 세계의 시민, 21세기의 선교사」라는 책으로 출간됐다.


여러 인상적인 대목 가운데 특히 주목할 부분은 성직자 성학대 추문에 대한 교황의 발언이다. 이는 지금까지 교회 지도자들에게서 들어왔던 수사와는 결이 조금 다르다.


지금까지 교회 지도자들은 몇 가지 뼈아픈 교훈을 얻어왔다. 예컨대 변명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 여론은 즉각적으로 들끓는다. 또 피해자의 고통에 둔감하게 보이면 역시 강한 반발이 일어난다. 


그래서 교회 당국자들은 추문에 대해 언급할 때 따라야 할 일종의 ‘대본’을 갖게 되었다. 피해자에 대한 우려 표명으로 시작하고, 교회의 실패를 인정하며, 아직 완전히 해결되진 않았지만 개혁이 진행 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고통을 축소하거나 부정하는 뉘앙스는 철저히 피한다.


교황 역시 인터뷰에서 피해자들을 향한 “진실하고 깊은 감수성과 연민”을 강조했고, 학대 사건 수사와 판결의 지연에 대해 좌절감을 토로했으며, 피해자들이 반드시 사제와 교회 지도자들의 동반을 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많은 가톨릭신자가 속으로는 공감하면서도 공개적으로 말하기는 두려워했던 두 가지 지점을 덧붙였다.


첫째, 피해자의 권리를 지키는 것만큼이나 성직자와 피의자들의 정당한 법적 절차에 관한 권리도 보장돼야 한다는 점이다. 대다수 성학대 신고는 정당하지만, 거짓 고발도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피의자 역시 권리가 있으며, 많은 이들이 그 권리가 존중되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실제로 거짓 고발이 입증된 사례도 있었습니다. 삶이 파괴된 사제들도 있었습니다.”


그는 이어서 강조했다. “피해자의 고발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고 해도, 그것이 무죄 추정의 원칙을 무효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사제이든 피의자이든, 권리는 보호되고 존중받아야 합니다.”


이는 사법 정의의 원칙에 있어 중요한 발언이다. 실제로 호주의 조지 펠 추기경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는 터무니없는 혐의로 400일 넘게 수감됐다가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처럼 대규모 사건이 아니더라도, 여러 사제가 교회 재판이나 민사 법정에서 ‘마녀사냥식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피해자 편을 외면한다는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 공개적으로 말하기 어려웠던 부분이다.


둘째, 교황은 성학대 위기로부터의 회복이 아무리 중요해도, 교회가 본연의 사명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교회 전체가 이 문제에만 전적으로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세상이 교회에 기대하는 진정한 응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많은 신자가 속으로는 동의했지만, 개혁의 필요성을 축소하는 것으로 보일까 우려해 쉽게 말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결국 교황의 솔직한 발언은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미 오랜 시간 성학대 추문과 함께 살아왔고, 이제는 보다 성숙한 공적 담론의 단계에 들어서서, 특정한 발언이 곧바로 ‘부정이나 은폐’로 몰리지 않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동시에 이는 교황 개인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불편하거나 정치적으로 부적절해 보일 수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인물로 보인다. 어쩌면 그는 결국, 진실이야말로 최고의 홍보 전략이라고 믿는지도 모른다.



글 _ 존 알렌 주니어
교황청과 가톨릭교회 소식을 전하는 크럭스(Crux) 편집장이다. 교황청과 교회에 관한 베테랑 기자로, 그동안 9권의 책을 냈다. NCR의 바티칸 특파원으로 16년 동안 활동했으며 보스턴글로브와 뉴욕 타임스, CNN, NPR, 더 태블릿 등에 기사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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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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