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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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을 넘나드는 사랑의 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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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초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50차 WWME 아시아회의’에 다녀왔다. 부부가 하나 되어 하느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메리지 엔카운터(ME) 운동’을 함께 하는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일본, 대만, 중국,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인도, 필리핀, UAE, 한국 등 12개 나라 대표들이 모였다. 올해로 50회째를 맞는 뜻깊은 회의여서 세계ME 대표인 다니엘·클라렐 부부와 마이클 주교도 내내 함께했고, 지난해 말 한국대표가 된 우리 부부에겐 처음 참석한 아시아회의였다. 일주일 동안 많은 걸 보고 느꼈는데, 무엇보다 사랑이 끊임없이 흘러가며 순환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은 값진 시간이었다.


한국의 ME 운동도 교구마다 사정이 다르고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한 교구가 있듯, 아시아 각국 역시 형편이 달랐다. 특히 일본과 대만은 발표팀 부부와 사제가 부족해 ME주말 개최조차 힘겨운 상황이었다. 외로이 작은 불씨를 지키듯 ME를 이어가는 모습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회의 기간 중 일본 대표팀 히로미·히사미 부부와 에드몬드 신부, 대만 대표팀 에디·에스터 부부와 안토니오 신부와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일본과 대만 현지에서 사목 중인 한국인 사제들 가운데 ME주말 발표를 맡을 수 있는 분들을 연결하고, 일본어와 중국어가 가능한 한국 발표팀도 필요하다면 파견하기로 했다. 한국ME가 일본과 미국의 도움으로 시작되었듯, 이제는 우리가 받은 사랑을 되돌려줄 차례라는 것을 절감했다. 받은 사랑은 필요한 곳으로 다시 흘러갈 때 비로소 완전해진다.


한국ME의 첫걸음은 1976년 주한미군을 위한 영어 주말이었다. 미국에서 파견되어 한국에서 사목 중이던 메리놀 외방 전교회 마진학 도널드 신부와 주한·주일미군에서 근무하던 미국인 군속 부부들이 발표팀을 맡았고, 영어주말에 참가한 한국인 부부들이 이듬해 1977년 3월에 첫 한국어 주말을 열면서 한국ME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한국 천주교가 초창기에 중국과 파리외방전교회의 크나큰 도움을 받아 뿌리내렸듯, ME 역시 이웃 나라 사랑의 손길로 싹틀 수 있었다.


아시아회의 중 소풍 시간에 가보았던 ‘착한목자대성당’은 깊은 울림을 주었다. 이 성당은 2대 조선대목구 교구장이었던 파리외방전교회 엥베르 주교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그는 조선 입국을 앞두고 한동안 싱가포르에 머물며 준비했는데, “목자는 목숨이 위태로운 곳이어도 양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마침내 조선에 들어와 한국교회를 돌보다 순교했다. 싱가포르 신자들은 그를 기려 성당을 세우고 유해를 모셨다. 목숨을 걸고 한국의 양들을 찾아온 엥베르 주교와 샤스탕, 모방 신부의 사랑을 싱가포르에서 느끼며, 사랑은 시공을 초월하여 순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폐막미사에서는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서 평생 ME 운동을 해온 97세 미카엘 아롤 신부를 만났다. 그 역시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로 싱가포르ME의 역사이자 산증인이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폐막미사를 함께하는 모습은 뭉클한 감동이었다. 그처럼 젊은 날 아시아의 다른 나라 한국에 와서 평생 사랑을 쏟고 올해 선종하신 두봉 레나도 주교님이 떠올라 감사기도를 드렸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현 싱가포르ME 대표사제인 도미니크 신부께 한국인으로서 깊은 감사를 전했다.


아시아 안에는 아직 ME의 씨앗이 뿌려지지 않은 곳도 있다. 베트남과 태국이 그렇다. 현지 한국인 부부들을 위한 한국어 주말을 열고, 한국어가 가능한 현지 부부들을 함께 초대한다면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씨앗이 자라 큰 나무가 되고, 그 나무가 또 다른 그늘을 만드는 사랑의 순환이 아시아로 또 세계로 퍼져가는 꿈을 꾼다.


이번 아시아 회의는 연례적인 회의라기보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여준 깊은 체험의 시간이었다. 우리가 받은 사랑을 가두지 않고 다시 흘려보낼 때, 사랑은 더 커져 돌아온다.


사랑은 살아 움직인다. 머무르지 않고 흐른다. 시공을 넘나들며 이어지는 그 사랑이 세상을 치유하고 우리 교회를 새롭게 할 것이다. 나는, 우리는 어떤 사랑을 받았는가? 그리고 그 사랑을 오늘 누구에게 되돌려 줄 것인가?



 글 _ 정석 예로니모(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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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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