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년 전의 로마 수도교로 유명한 스페인의 내륙 도시 세고비아에는 ‘가르멜의 성모 수도원’이 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가르멜회 개혁(맨발의 가르멜회)을 주도한 ‘십자가의 성 요한(1542~1591)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어 한국 순례객들도 많이 찾는 곳이다. 그러나 성당 주제단 오른편에 있는 또 다른 무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세고비아 출신의 귀부인 아나 데 페냘로사(Ana de Pe?alosa)가 그 주인공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1582년 1월 그라나다에서 시작되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개혁수녀원 창립을 위해 수녀들을 이끌고 왔으나 쇠락한 도시에 수도원이 늘어나는 걸 우려한 그라나다 대주교의 반대에 부딪혔다. 일행은 새벽에 도착했으나 들어갈 집이 없었다. 이때 아나가 기꺼이 자신의 집을 빌려주었다. 당시 아나는 남편과 사별하고 외동딸까지 잃은 후라 삶에 대해서나 신앙적으로 심한 무기력감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요한을 고해신부로 삼고 영적인 지도를 받으며 점차 절망에서 벗어났다.
요한은 그라나다의 ‘순교성인들의 수도원’ 원장으로 6년간 있으며 아나와 깊은 우정을 쌓았다. 그녀의 요청으로 시 「타오르는 사랑의 불꽃(Llama de amor viva)」을 쓰기도 했는데, 비록 하느님과의 합일을 다룬 신앙적인 내용이기는 하지만 그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속세의 한 여인에게 헌정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각별하다.
한편, 아나는 요한의 권고에 따라 세고비아의 ‘가르멜의 성모 수도원’ 건립을 재정적으로 후원하였다. 요한이 1588년 이 수도원장으로 발령받자 그녀도 세고비아로 거주지를 옮겼다. 떨어져 있는 걸 원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사제’와 ‘미망인’은 어차피 물리적으로 함께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성녀 데레사 사후 맨발의 가르멜회 내부의 권력 다툼에 염증을 느낀 요한은 1591년 6월 누에바 에스파냐(오늘날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 지역)로 파송을 자원했다. 그가 세고비아를 떠나던 날 아나는 “신부님, 왜 저를 버리고 가십니까?”라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요한은 출국 준비를 위해 안달루시아의 한 수도원에 머물다가 급성 감염병인 단독(丹毒) 증세를 보여 치료를 위해 우베다의 ‘산 미겔 수도원’으로 옮겨왔다. 이 삶의 마지막 여정에서도 그는 근황을 알리는 몇 통의 편지를 아나에게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생애 마지막으로 쓴 편지의 수신인도 그녀였다.
1591년 12월 요한이 선종하자 아나는 두 차례의 시도 끝에 그의 유해를 우베다 주민들 몰래 세고비아의 수도원으로 빼돌리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이 과정에서 잘린 그의 손가락 하나를 작은 은제 함에 담아 죽을 때까지 가슴골에 넣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마침내 그녀도 1608년 같은 성당에 묻혔다.(주제단 벽감의 무덤은 비어 있으며 진짜 유해는 납골당에 있다) 죽어서야 십자가의 성 요한과 한 지붕 아래에서 영원히 잠들 수 있게 된 것이다.
필자는 올여름 세고비아의 이 수도원을 찾았다. 성당의 주제단 앞에서 홀로 묵상하던 중 문득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아나 데 페냘로사는 십자가의 성 요한을 사제로서 공경한 것일까, 아니면 남자로서 사랑한 것일까? 답은 납골당에 누워있는 그녀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글 _ 전용갑 요셉(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캠퍼스 스페인어통번역학과 교수, 세계문학비교학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