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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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칼럼이다. 여러모로 송구하다. 다른 분들처럼 일상을 소재로 마음에 ‘울림’을 주는 좋은 글을 쓰지 못했다. 평소 신앙적 성찰이 부족했던 탓이다. 그나마 전공 경험에서 얻은 스페인, 중남미 관련 일화들로 간신히 횟수를 채웠다. 오늘 역시 보잘것없는 경험담이다.


이십여 년 전 마드리드 유학 시절의 일이다. 부르고스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마침 그곳 수녀원에 한국 수녀님이 한 분 계시니 가는 김에 떡과 고추장 등 한국 식재료를 전달해 주라는 부탁을 받았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정확한 기억은 없으나 아마도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창립한 맨발의 가르멜회 수녀원이 아니었던가 싶다.) 


내심 귀찮았으나 물어물어 말로만 듣던 봉쇄수녀원의 면회실에 들어섰다. 잠시 후 창살 건너편으로 수녀님이 나오셨다. 뜻밖에도 젊고 아름다운 분이었다. 노총각이던 필자의 가슴이 뛰었다.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화는 길지 못했다. 같이 계신 할머니 수녀님들이 한국 음식을 좋아하셔서 떡볶이를 만들어드리려 한다며 고맙다고 하셨다. 헤어지면서 “저분은 무슨 사연이 있길래 이 먼 곳까지 오셔서 세상과 담쌓고 사시는 걸까?” 하는 생각과 왠지 모를(?) 허탈감을 느꼈다.


세월이 흘러 2023년 여름, 필자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조용한 산골 마을 ‘베아스 데 세구라’에 있는 맨발의 가르멜회 수녀원을 찾았다. 이번에는 아내와 함께였다. 이곳 역시 예수의 성녀 데레사께서 창립한 개혁수녀원으로, 한때 인근의 남자 수도원장으로 있던 ‘십자가의 성 요한’이 수녀들을 지도했던 유서 깊은 장소다.


수녀원 내부 2층에는 면회실과 두 성인의 유물이 전시된 작은 박물관이 있다. 하지만 현재도 봉쇄수녀원으로 운영되고 있어 늘 문이 닫혀있다. 들어가려면 인근 관광사무소에 가서 소정의 입장료를 내고 안내인을 따라가야 한다. 우리를 안내한 이레네라는 여직원은 여기까지 찾아오는 한국인 신자는 거의 없었다며 무척 반가워했다. 


그리고 뜻밖에도 이곳에 한국 수녀님이 한 분 계신다고 했다. 잠시 뵙고 인사라도 드리고 싶어 이레네를 통해 수녀원 측에 의사를 전달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아마도 관상 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신 듯하다. 대신 우리 부부를 위해 기도해 줄 터이니 어디서 온 누구인지만 말해달라는 수녀님의 전갈을 받았다.


순례를 마치고 떠나려는 데 왠지 짠한 마음이 가시지를 않았다. 이 외진 스페인 시골에 한국 수녀님이라니! 유학생 시절 부르고스의 한국 수녀님께 고추장을 가져다드렸던 기억이 났다. 성가신 불청객처럼 여기실까 조심스러웠으나 라면 등 남은 간편식을 되는대로 챙겨 이레네를 통해 수녀님께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마을을 등지고 시골길을 운전하는데 옛날과 똑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저분은 무엇 때문에 이 먼 곳까지 오셔서 세상과 담쌓고 사시는 걸까?” 이십여 년이 지났으나 필자는 여전히 그분들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 다만 신앙이 깊은 독자분들은 이해하실 것 같아 수녀원 면회실 벽에 적혀있던 다음 문구를 소개한다.


“만일 지상천국이 존재한다면 이 집이 바로 그곳입니다. 이 집은 오직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로만 기뻐하며, 자기 자신의 기쁨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사람들만을 위한 곳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완덕의 길」 중)



글 _ 전용갑 요셉(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캠퍼스 스페인어통번역학과 교수, 세계문학비교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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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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