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벤스의 ‘암브로시우스 주교와 테오도시우스 황제.’ 1615,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
서기 391년, 광개토대왕이 고구려 왕위에 올라 과감한 팽창정책을 추진하던 그해, 로마제국에서 대형 사건이 터진다.
로마제국 황제가 사형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됐다! 원래 로마는 신화의 나라였다. 하지만 391년 이후 로마에서 그 신화가사라진다. 로마제국의 변방, 동부전선에서 예수라는 이름의 유대인이 십자가에서 처형된 후, 360여 년 만에 일어난 대형 사건이었다.
이 대하 드라마에는 10여 명의 비중 있는 주연이 등장하는데, 스토리를 맨앞줄에서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391년 ‘로마제국=그리스도교 국가’ 등식을 법제화를 통해 완성한 테오도시우스 황제(Theodosius, 재위 379~395)다. 물론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 국가가 된 것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건이 아니다. 391년 이전에도 로마제국의 황제들은 그리스도교 신자였다. 그래서 어떤 연구에서는 380년 로마제국 서방 황제 그라티아누스와 동방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니케아 신경을 수호하고 이단을 정죄한 ‘테살로니카 칙령’을 국교 선언으로보기도 한다. 물론 이 칙령은 교회 역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칙령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를 믿는 사람만이 가톨릭 신앙인임을 천명하는 내용을 담고있는데, 여기서 ‘보편적인’이라는 뜻을 가진 ‘가톨릭’ 명칭이 나타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Hanc legem sequentes Christianorum catholicorum nomen iubemus amplecti,”
“이 법을 따르는 이들에게 가톨릭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부여한다.”
그런데 380년 이 칙령 반포를 전후로 로마제국 상황이 급변한다. 이야기가 상당히 복잡해지는데, 간단히 정리하자면 서로마 황제가 죽고, 로마 제국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만 남게 됐다. 이에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넓은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단 하나의 종교, 단 하나의 교의, 단 하나의 신앙을 선포했고, 그것이 바로 391년 행정법으로 완료되는 그리스도교 국교화이다. 이후 로마의 신들은 갈 곳을 잃었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 알렉산드리아 세라피스 신전, 로마 판테온 신전에 있던 신상들이 모두 제거되고 성당으로 리모델링됐다.
이를 두고 일부 역사가들은 부정적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로마 제국 쇠망사」를 집필한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1794)은 “박해받던 종교가 박해하는 종교가 됐다. 고대의 위대한 유산이 돌이킬 수 없이 사라졌다”며 그리스도교로 인해 찬란한 그리스 로마 문화유산이 훼손되었다고 주장했다. 브라이언 무라레스쿠(Brian C. Muraresku)도 「불멸의 열쇠」에서 “예수의 호전적인 용병들은 신전을 낱낱의 돌덩이로 해체했고 거대한 대리석 기둥들을 쓰러뜨려 벽 자체도 무너지게 만들었다”고 썼다. 그는 심지어 당시 상황을 IS(이슬람국가)가 고대 유적을 파괴하는 것에 비교했다.
하지만 이는 고대 기록의 일부분을 과장해 해석한 것으로 여겨진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신전에 국가 재정을 투입하지 않는다고 했지, 신전을 파괴하라는 직접적인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신앙심 깊었던 지방 총독들과 과격한 일부 주교와 신자들이 개별적으로 신전을 파괴하는 일은 있었지만, 제국 차원의 조직적인 파괴는 없었다.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Dionysios Stathakopoulos)는 「비잔티움의 역사」에서 “제국 전체에서 이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있었으리라고 판단하는 것은 단편적 생각”이라며 “그보다는 의례를 통해 공공 영역에 존재하던 고대 종교의 역할이 시대적 흐름에 따라 차츰 작아지며 종국에는 사라졌다는 것이 더 정확한 평가”라고 했다.
실제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척결하고자 했던 것은 로마의 신들(이교)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교 이단이었다. 황제는 가톨릭 세례를 받은 확고한 정통파 신자였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성 이레네(헬레나) 성당에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개최해 아리우스 이단을 단죄했다. 황제는 더 이상 그리스도교가 이단으로 인해 분열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아리우스파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테오도시우스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또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국경을 침범하는 고트족 등 이교도들을 제압해 제국의 건재함을 과시했는데, 그들에게 정통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는 노력도 병행했다. 황제는 고대 이집트 파라오(투트모세 3세)가 세운 오벨리스크를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옮겨와 원형 경기장에 두었는데, 그 기단부에 야만족들을 제압하고 가톨릭 신앙을 전하는 황제의 위엄을 새겨 넣었다. 하지만 그의 영광도 오래가지 않았다. 동서 통일 로마제국의 영광과 가톨릭신앙 전파를 위해 헌신한 황제는 395년, 48세 나이에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테오도시우스 황제 사후, 로마제국은 거대한 격랑에 휩싸이게 된다. 국제정세가 급변하고 있었다. 아시아에서 갑자기 나타난 훈족 때문이었다. 로마 측 기록에 따르면 훈족은 키가 작고, 피부가 누렇고, 코가 낮고 넓으며, 눈이 위로 찢어져 올라가 마치 지옥에서 막 올라온 마귀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되어 있다. 훈족이 당시 로마인들에게 얼마나 공포의 대상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연구마다 달라 어떤 것을 신뢰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훈족이 아시아 깊은 곳에서 서아시아와 동유럽으로 대거 이동했다. 이 이동은 연쇄적인 민족의 대이동을 불러왔다. 기존에 서아시아와 동부 유럽에 살고 있던 고트족 등 게르만 민족들이 훈족을 피해 서유럽으로 밀려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다. 이는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서기 300년대 중반부터 400년대 중반까지 100여 년에 걸쳐 일어났는데, 특히 테오도시우스 황제 사후에 그 물결이 거셌다. 그 거센 물결에 올라탄 것은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왕관을 물려받은 두 아들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그릇을 따라가지 못했던 두 아들은 이 혼란을 수습하기에 역량이 부족했다.
그런데 이 역사적 격랑, 그리고 그 격랑을 헤쳐가는 교회의 역사를 알아보기에 앞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인물이 있다.
역사에서 위대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한꺼번에 몰려다니는 경향이 있다. 기원전 400년대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고, 서기 1400년대의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가 그렇다. 마찬가지로 서기 300년대 후반, 성 암브로시우스, 테오도시우스 황제와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하며 교회의 기틀을 놓은 위대한 인물이 있다. 바로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354~430)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