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저자는 로마제국 여러 곳에 흩어져있는 작은 신앙공동체들, 특히 소아시그들은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 박해는 매우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감옥에 갇히고(2,10) 순교하였으며(2,13; 6,9-11; 7,13-14)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2,3-4)
믿는 이들의 공동체는 이외에도 다른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랜 싸움에 지쳐서(2,2) 처음에 지녔던 열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2.4) 그리고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처럼 자신들을 내세우는 거짓 지도자들이 생겨났고(2,2) 혼란을 가져오는 엉터리 교설도 나돌았습니다.(2,6.15)
또 유다인들로부터의 박해도 있었고(2,9; 3,9)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다른 종교를 혼합시키는 일도 있었습니다.(2,14-15.20) 어떤 공동체들은 점점 시들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3,1) 그러나 비록 미약하기는 했지만 신앙을 굳게 지키는 공동체도 있었습니다.(3,8)
일반적으로 신자들은 가난하고 궁핍하였습니다.(2,9) 그나마 좀 부유한 공동체들은 자족하는 상태였으며(3,17)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였습니다.(3,15) 이처럼 작은 믿음의 공동체들을 위해 저자는 묵시록을 썼습니다.
요한 묵시록 일곱 교회 중 한 곳인 티아티라 교회의 유적
Q. 요한 묵시록의 역사적 배경은?
A. 요한 묵시록이 집필되었던 시기는 로마황제 도미티아누스가 통치하던 시대였습니다. 로마제국은 방대한 영토의 식민지를 통치하면서 황제의 절대 권력을 끊임없이 행사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제국은 모든 식민지 백성들로 하여금 황제를 숭배하는 의식을 거행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것은 식민지 백성들로 하여금 황제에게 절대복종을 하게 하려는 정치적 방편이었습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자신을 ‘주님’이라고 부르도록 강요했던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곧 ‘주님’이기 때문에 백성들 모두가 황제인 자신에게 당연히 종교의식을 거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절대적인 신(神)에게 하듯, 황제인 자신에게도 당연히 종교의식을 거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강요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협상의 여지가 전혀 없는 선택 앞에 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만 바치는 경신례와 같은 의식을 로마 황제에게 바침으로써 다른 사람들처럼 로마제국 안에서 정상적인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께만 경신례를 거행할 수 있기에 그 외에 다른 모든 종교의식들은 우상숭배에 불과한 것이라고 간주하여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로마의 실정법을 어기는 삶을 계속 살아갈 것인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 두 가지 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하도록 강요받고 있었습니다.
Q.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왜 환시와 상징들을 사용합니까?
A. ① 교우들에게 하느님의 평화를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환시들은 교우들로 하여금 하늘을 보게 합니다.(4,1) 그곳은 하느님의 옥좌가 있는 곳입니다.(4,2-11)
환시는 하느님께서 저 높은 곳에서 단호하고도 분명하게 불의와 박해에 대항해서 싸움을 지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우리에게 평화를 전해줍니다.(11,14-18; 12,10-11)
② 백성을 억압하는 자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박해 시기에는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너무 많이 말하는 사람은 형제들을 다치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알릴 것이 있는 사람은 함께 싸우는 동지들만 이해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전합니다.(14,3)
환시는 상징들과 더불어 사람들을 깨우치는 수단이었고, 교우들을 박해자들의 손에서 보호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런 환시와 상징들은 박해받는 사람들에게는 메시지를 밝혀 주지만, 박해자들에게는 그것을 감추어 버립니다.
③ 교우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입니다.
그림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해주고 드라마는 설교보다 더 효과적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림이나 연극, 영상이나 포스터, 그리고 비유 같은 것들을 더 자주 사용합니다. 요한 묵시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글 _ 박정배 신부 (베네딕토, 수원교구 용인본당 주임)
1992년 사제서품. 수원교구 성소부장과 수원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수리산성지 전담 신부 등을 역임했으며 양지본당, 광북본당, 샌프란시스코 한인본당, 신둔본당, 철산본당 주임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