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 친구가 달력을 뜯어내며 ‘앗싸, 이번 달만 학원비 내면 끝이다!’ 하며 좋아하던 생각이 납니다. 그 친구는 자기 혼자 ‘재수는 없다!’라는 각오로 아이 학원비에 엄청나게 쏟아붓고 있는데 지난달에 11월 치 학원비 수백만 원을 내며 마치 적금 만기처럼 기뻐했지요.
남은 달력 두 장을 보며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이 드는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저는 한 해의 마지막인 12월보다 항상 11월이 더 불안정한 느낌입니다. 어쩌면 몸이 기억하는 제 삶의 부정적인 경험, 긴장과 불안. 그런 것들이 바람결에 건드려져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마침 스마트폰에서 ‘1년 전, 15장의 사진이 도착했어요’라며 알림을 보내왔습니다. ‘지난해 오늘’을 담은 디지털 앨범, 그 사진 속에는 불안할 때마다 향했던 저의 발길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지요. 혼자 카페에 앉아 긴장을 누그러뜨리던 시간, 성당 성모상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초를 봉헌하고 알록달록한 유리컵 초를 보며 ‘모두 나처럼 간절하겠지?’ 싶었던 시간. 그런데 그때는 1년 후 지금의 삶을 조금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는 그 진부한 표현을 이젠 무릎을 치며 공감하고 있는데요.
고등학교 자퇴생이던 아이가 1년 새 대학생이 될 줄을 어떻게 알았으며, 그것도 모자라 대학 생활을 접고 이제는 본인이 원하는 삶을 살겠다며 자기 주도의 삶을 선언하게 될 줄은 또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또 요즘은 자꾸 자기를 통제하려 들면 내년엔 독립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습니다. 또래보다 2년쯤 빠르게 삶의 시계를 돌리며 살아온 아이라 지금 내놔도 당차고 다부지게 살 거란 걸 알지만, 그럼에도 차마 떨쳐내지 못하는 부모의 ‘불안’이 있습니다.
부모는 왜 이렇게 자꾸 불안할까요?
이 ‘불안’이란 감정에 대해 상담전문가 이서원 교수(서강대 대학원 겸임교수)
는 ‘마음의 안개’라고 표현했습니다. 어디가 길이고 안전한지 알 수 없어서 올라오는 불안감.
실은 내디뎌보기 전엔 모르는 게 불안이니, 차라리 내 발로 내디뎌보는 게 빠르지요. 그런데 이런 마음의 안개가 자욱한 아이에게 남편은 요즘도 자꾸 본인 방식과 기준대로 아이의 불안마저 통제하려 들 때가 있습니다. 주로 이런 말이지요. “내 말 들어!”
그것도 자식을 사랑하는 아비의 마음이라는 건 알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불안한 세상보다 더 불안한 게 아빠의 그 말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아빠가 아닌데….’
세상도 마음의 안개가 자욱한데 아빠가 본인의 자율성마저 뺏어가려 드니 마음의 안개가 더 짙어질 수밖에요. 길이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내 존재가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기분마저 들 수 있지요.
뼈아프게 부족했던 저의 양육의 경험을 거슬러 돌아볼 때 자식에게 자율성과 함께 사랑을 듬뿍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또 한 번 저무는 한 해를 바라보며 늦은 후회를 해 봅니다. 지난여름 휴가차 한국에 들어오셨던 교황청 성직자부장관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님이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하신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누구든지 사랑을 받으면 힘이 생겨요.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준다고 그러면 기분이 좋아요, 힘이 나요. 사랑하면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돼요.”
불안한 세상, 마음의 안개가 가득한 채 자식을 바라보고 있다면 진짜 아이가 힘을 낼 수 있는 방법으로 아이를 도와주면 좋겠습니다. 내 방식의 사랑이 아닌 아이가 원하는 방식의 사랑으로.
그게 쉽지 않다면 ‘관대한 허용’을 뜻하는 관용으로 그 사랑을 다시 시작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부디 오늘도 당신의 자녀와 안녕하기를 빕니다.
글 _ 최진희 (안나, 서울대교구 문래동본당)
국문학을 전공하고 방송 구성작가로 10여 년을 일했다. 어느 날 엄마가 되었고 아이와 함께 가는 길을 찾아 나서다 책놀이 선생님, 독서지도 선생님이 되었다. 동화구연을 배웠고, 2011년 색동회 대한민국 어머니동화구연대회에서 대상(여성가족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휴(休)그림책센터 대표이며, 「하루 10분 그림책 질문의 기적」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