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봄’ 합창하며 강제징용된 조선인 희생자 넋 기려
17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의 마루나미 해안. 한국과 일본 주교들이 잔잔한 파도를 바라본다. 오래전 탄광의 환풍구 역할을 했던 콘크리트 기둥, ‘피야’(備矢) 두 개가 해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주교들이 바친 해바라기꽃이 물결을 따라 떠다닌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 꽃, 살구 꽃, 아기 진달래?.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몇몇 한국 주교가 조용히 ‘고향의 봄’을 부르자, 다른 주교들도 천천히 음을 맞추며 따라 부른다. 일제강점기 고향을 떠나 이 바다에 묻힌 조선인 노동자를 향한 작은 추모다. 주교들은 앞서 ‘장생 탄광 수몰사고 희생자 추도비’ 앞에서 탄광에서 희생된 이들을 위해 마음 모아 기도했다.
장생(長生, 조세이) 탄광은 1914년 개광한 해저탄광이다. 전성기에는 1000여 명이 일하며 연간 약 16만 톤의 석탄을 채굴했다. 1942년 2월 3일 갱도 내부에서 발생한 이상 출수로 갱도가 붕괴되며 183명이 숨졌고, 이 가운데 136명은 조선인 노동자였다.
오랫동안 잊혔던 이 사고는 1976년 역사 연구자 야마구치 타케노브씨가 관련 논문을 발표하며 다시 주목받았다. 이후 1991년 그는 ‘장생 탄광의 수비상(水非常)을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하 ‘역사에 새기는 모임’)을 결성했다. ‘역사에 새기는 모임’은 2013년 ‘장생 탄광 수몰사고 희생자 추도비’를 세우고 이곳을 ‘장생 탄광 추도 광장’으로 조성했다.
‘역사에 새기는 모임’ 이노우에 요코 공동대표는 “탄광 유골 발굴은 2024년부터 잠수 조사가 본격화되어 2025년 일부 유골이 확인됐으며 현재 신원 확인 중”이라며 “이 과정은 일본 역사 안에서 잘못을 명확히 밝히는 일”이라고 밝혔다. 그는 조선인 희생자들의 존엄을 회복하고, 일본 정부가 책임있는 조치를 취하도록 운동을 이어가겠다고 전했다.
2년 전 이곳을 순례한 이기헌(전 의정부교구장) 주교는 “강제로 끌려와 바다 속 탄광에서 생을 마감한 조선인 노동자들을 생각하면 더욱 가슴이 아프다”며 “최근 유골 발굴이 시작된 만큼 한일 양국 정부가 협력해 좋은 결실을 맺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한일 주교들은 기도와 헌화가 끝난 뒤 파도에 실려 멀어지는 해바라기꽃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바다는 83년 전 수몰 사고로 스러진 조선인 노동자들의 이름 없는 역사를 품고 있었다.
주교들은 이날 장생 탄광에서 강제 징용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20일까지 이어지는 제27회 한일주교교류모임의 첫 일정을 시작했다. 올해 모임 주제는 ‘전후 80년의 흉터와 희망 : 젊은 세대에 평화를 연결하기 위해’다.
일본=이지혜 기자 bonappetit@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