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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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통치 앞에 무너져 내릴 악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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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원 성 요셉 상 앞에는 늘 꽃이 꽂혀 있는데, 누군가 그 옆에 연둣빛 모과 두 개를 올려 두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누런 황금색을 띠고 있는 것을 보면서 세월이 흘러도 생명이 있는 것은 여전히 있는 그대로 존재함으로 자신의 값을 다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자연은 이렇게 여여(如如)한데 인간의 악행은 세기를 거듭해 순수한 세계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비인간적, 비윤리적, 비상식적 삶의 방식으로 자본을 축적하는 사회적 현상들은 인간의 존엄성보다는 돈의 가치에 중점을 두는 거센 세상의 흐름 안에서 무섭게 드러난다. 전쟁을 조장하는 몇몇 세계 정치지도자들의 횡포뿐만 아니라 스마트폰을 소지한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받아봤을 보이스 피싱도 개인의 삶을 무너트리는 폭력이다.

 

 

스마트폰으로 걸려 오는 전화를 받고 거기서 들려오는 지시에 따라 가슴을 조이며 은행으로, 더러는 희망에 부풀어 먼 타국으로 향하고, 익숙한 이름으로 온 낯선 청첩장을 열어보다 정보를 다 털리기도 한다. 이 국제적 조직이 순박한 사람들의 손안으로 들어와 그들 삶에 균열을 내고 있다. 일부는 국가와 결탁해 부정한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니 당해낼 이 누구인가.

 

 

제1차 세계대전 후 팽배해진 세속주의와 무신론을 경계하면서 비오 11세 교황은 1925년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제정한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허름한 말구유를 요람 삼아 극도의 가난 안으로 들어오셨고, 최후는 십자가 극형이었다. 머리 기댈 곳조차 없는(마태 8,20 참조) 그분의 삶은 가난으로 점철되었으나 부족함이 없으셨다. 따뜻한 동행으로 함께 머물며 제자 됨의 도를 배워 익힌 당신 제자들에게 길을 떠날 때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신 분이시다.(마르 6,8 참조) 삶의 주인이신 하느님 외에는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말라는 당부다.

 

 

이른 나이에 생의 마무리를 할 시점이 왔을 때, 그분은 사랑하시던 제자들의 발을 손수 닦아 주시며 사람이 사람을 섬기는 것의 진면목을 드러내셨다. 다른 사람보다 많이 갖고 높이 올라가 군림하는 것이 왕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으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자를 끌어안아 함께 걸어가는 것(시노달리타스)이 진정한 왕의 모습을 갖춘 것이라고 본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렇기에 거대 사기행각으로 부를 축적하는 조직, 국익을 위해 과도한 관세를 물리거나 군사력으로 가난한 지역을 초토화하는 반인륜적 작태들은 사랑으로 완성된 그리스도의 보편적 왕권 앞에서 힘없이 무너지리라. 불신과 폭력으로 가득 찬 이 무서운 사회에, 우리의 희망이신 그리스도의 왕권은 ‘사랑의 통치’가 진정한 다스림이자 부(富)임을 보여 준다.

본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텔로스(τ?λο?, telos)’라는 용어는 ‘완성’ 혹은 ‘목표’를 뜻한다. 이 텔로스는 구원 역사의 완성을 의미하는 ‘혼인 잔치’라는 뜻으로도 쓰여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피조물과 하나 되신 예수님의 강생으로 시작된 인류 사랑의 여정이 십자가 죽음으로 완성되었음을 말하기도 한다.(요한 2장, 묵시 19장 참조)

 

 

가난한 말구유에서 시작된 탄생에, 처절한 십자가 위의 죽음으로 마무리된 인생이 어찌하여 사랑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죽음은 새로운 탄생 곧 부활로 이끄는 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에는 늘 성모님께서 계셨다. 그러기에 그분을 ‘하늘의 문’이라고 일컫는다.

 

 

하느님이 없는 듯 사는 이들에게 다른 이의 것을 삿된 방식으로 취하는 것이 양심의 가책이나 되겠는가. 성모님께서는 영혼을 잃어버린 이 사람들을 당신 품에 안으시고 끊임없이 아드님 앞으로 데려갈 채비를 하실 것이다. 무시무시한 악들은 가난한 사랑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섬기는 통치권에 의해 구원으로 채워질 것임을 믿으시면서.


 

 

글 _ 이은주 마리헬렌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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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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