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더듬어 예전에 읽었던 책의 내용을 떠올려봅니다. 어느 병원에서 사도직을 수행하고 계신 수녀님의 이야기였습니다.
수녀님은 수도 생활을 시작하기 전 평신도였을 때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던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침상에 누워 멍한 눈으로 천장을 응시할 뿐 다른 것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에게는 한 가지 특이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이불이든 베개든 인형이든 상관없이 무엇이든 천으로 싸여진 물건을 발견하게 되면 그 즉시 천을 모두 벗겨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문제인가 싶으시죠? 문제는 그렇다 보니 자신이 입고 있던 환자복까지도 모두 벗어 던지고, 늘 알몸으로 지낸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옷을 입히고, 입히고, 또 다시 입혀도 그때마다 그분은 옷을 벗어 던져 버렸습니다.
의사들은 그분의 병을 진단하면서 ‘평생 침상에나 누워지내야 할 여인’이라고 할 정도로 낙담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이 보이는 특이한 행동의 원인을 찾아내려고 동분서주하였지요. 결국 ‘자신을 사람이 아닌 사물로 여기는 마음’ 이 그 병의 원인이었음을 밝혀내었습니다. 옷은 사람에게나 필요하여 사람만이입을 수 있을 뿐, 사물인 자신에게는 필요치 않을뿐더러 입어야 할 이유도, 의미도 없다고 여기는 마음이 그분 안에 가득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병원에 봉사를 나오던 한 아주머니께서 아주 고운 실크 잠옷 한 벌을 사 들고 그분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것도 첫눈에 반할 정도로 아름답고 고운 밝은 분홍색 잠옷을 말입니다. 아주머니는 온 마음을 다해 그분을 꼭 안아주더니 “이 잠옷을 입으면 아주 예쁘고 편해질 거예요” 하면서 이내 그 곱디곱고, 어린 아기의 살결처럼 보드라운 분홍색 실크 잠옷을 그분에게 입혀 주었습니다. 그분은 말없이 아주머니의 포옹과 잠옷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은 그다음에 벌어질 일에 대해 쉽사리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더 이상 옷을 벗어 던지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는 무엇이든 벗겨내던 이상한 행동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첫 월급을 타게 되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라는 질문 앞에 이 땅의 많은 사회 초년생들은 “어머니께 빨간 내복 한 벌 사 드릴 거예요”라는 응답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러한 마음과 생각을 품고 첫 월급을 기다리고 계신 분들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저 또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하고많은 선물 중에 ‘빨간 내복’이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위의 이야기 속에서 찾아냈던 것 같습니다. 온몸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보드라운 내복. 색깔조차 강렬하고 화끈해 보이는 그 빨간색 내복이 우리 엄마의 몸을 온통 감싸 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자면, 저 자신 또한 덩달아 따뜻해짐을 넘어 후끈후끈 열이 날 것 같은 기분 좋은 상상을 하게 됩니다.
누군가의 귀한 딸로 태어나 더 많이 사랑받고 이쁨받았어야 할 한 여자아이가 사랑하는 부모님의 품을 떠나 한 남자를 만나 새롭지만 낯선 삶을 살아갑니다. 늘 평탄하고 안정적일 수만은 없는 결혼 생활에 더하여 시집살이의 설움과 외로움을 홀로 끌어안으며 한 남자의 아내이자 누군가의 며느리로 살아갑니다. 그나마 얼마 후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이 태어나면서 오랜 설움과 외로움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위로와 위안을 얻기도 하지만, 여전히 ‘누구의 아내’, 혹은 ‘누구 엄마’로만 불릴 뿐 자신의 이름조차 불리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아니, 이제는 자신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새까맣게 잊은 채 한 여인네가 되어 살아갑니다. 어느덧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검었던 머리에는 된서리가 내렸지만, 친정엄마를 닮아 그런거라 웃어넘기며 살아갑니다. 밭이랑보다 더 깊고 진한 주름이 한가득 파인 얼굴을 하였지만, 세월의 무상함조차 옅은 미소로 감추며 친정엄마 떠나신 하늘만 올려다보며 살아갑니다.
이야기 속 수녀님도 그런 마음이었을 테지요? 사람이 아닌 물건 같았던 자신의 존재가 처량 맞고 가련하여 오랫동안 서글펐을 테지요? 그러니 그 어떤 옷을 입혀 주어도 그때마다 헐벗은 것 같았던 마음 때문에 물건 같은 자신을 감싸고 있었던 천 조각들을 공중에 내다 벗어던져 버린 것이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첫 월급을 타고 돈이 생기면 제일 먼저 어머니께, 아니 엄마에게 ‘빨간 내복’을 선물해 드렸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더 이상 우리 엄마가 홀로 차갑게, 혼자 외로이 이 세상 속에서 어떤 물건처럼 살아가시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한가득 담아서 말입니다. 또한 우리 엄마가 온 우주를 통틀어 가장 소중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강렬한 매력을 지닌 여인이심을 잊지 마시라는 메시지를 꾹꾹 눌러 담아서 말입니다.
‘빨간 내복’이 나의 손을 대신하여 매일 우리 엄마를 어루만져 주길…. ‘빨간 내복’이 나의 품을 대신하여 하루 종일 우리 엄마를 안아 주길…. ‘빨간 내복’이 내복’이 나의 품을 대신하여 하루 종일 우리 엄마를 안아 주길…. ‘빨간 내복’이길….
글 _ 노성호 신부 (요한 보스코, 수원교구 명학본당 주임)
2004년 사제 서품. 평택 효명고등학교 교목, 수원교구 모산골, 양평, 죽전본당 주임을 거쳐 현재 명학본당 주임소임을 맡고있다. 한국교회 최초의 노래하는 형제 사제 듀오로, 동생 노중호 신부와 함께 2016년 Nobis Cum
(노비스꿈) 1집 ‘우리와 함께’를, 2022년 2집 ‘또 다시 우리와 함께’를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