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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스승 : 아우구스티누스 (01)

[월간 꿈 CUM] 교회의 꿈CUM _ 예수, 그 이후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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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로마 성 아우구스티누스 대성당


많은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 오해라는 나뭇가지 끝자락에 꽃을 피워보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성적으로 방탕한 젊은 시절을 보냈으며,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에야 금욕적인 신앙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레이보이가 아니었다.

물론, 「고백록」에 기록되어 있듯이 아우구스티누스가 17살 때 한 여인과 동거해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는 사실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가 젊은 시절 방탕하게 놀아났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는 354년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수도 아라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프리카 사람이었다. 당시 동거는 흔한 일이었다. 서기 300년대 중반 북아프리카에서는 17세 남성이 비슷한 또래 여성과 함께 사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고, 비난받을 일이 아니었다. 사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성적인 문제에 대해 관심이 적었다. 세속적 쾌락과 향락에도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는 매우 엄격한 종교인이었다. 청년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에 심취해 있었다.

여기서 생기는 궁금증. 마니교는 어떤 종교였을까. 마니교의 어떤 점이 당대 지식인이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마음을 뒤흔들었을까.

당시 지식인이라면 마니교가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삼위일체, 죽은 이가 살아났다는 부활 신앙, 예수의 몸과 피를 나눈다고 알려진 전례 등 그리스도교는 당시 지성인이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지식인들의 갈증을 한방에 풀어준 종교가 있었다. 마니교였다.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듯, 불교가 붓다(佛)의 가르침이듯, 마니교는 마니의 가르침이다. 헨드릭 빌렘 반 룬(Hendrik Willem van Loon 1882~1944)이 「무지와 편견의 세계사」(김희숙·정보라 옮김, 생각의 길, 2018)에서 정리한 마니교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페르시아인 마니(Mani)는 실존 인물로 3세기 초에 오늘날 이라크 남부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오늘날 뉴욕만큼이나 국제적이고 다국어가 공존하는 곳이었다. 성장한 마니는 불교, 그리스도교, 미트라교, 유대교에 고대 바빌론의 여섯 개 미신을 살짝 섞어서 자신만의 혼성 철학을 추출해냈다. 실제로 마니는 자신이 아담에서 시작하여, 아브라함, 붓다, 예수, 조로아스터로 이어져 내려온 예언자들의 마지막 계승자라고 생각했다.

마니는 여기에 악한 신과 선한 신이 인간의 영혼을 놓고 영원히 싸우고 있다는 고대 페르시아 신화를 섞어서, 악한 신은 구약성경의 야훼와 연결하고, 선한 신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연결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의 몸은 본래 혐오스럽고 천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끊임없는 육신의 고행을 통해 세속적인 야망을 버리려 노력해야 하고, 세상에서 가장 엄격한 섭생과 행실 규율을 지켜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악의 신의 마수에 걸려 지옥 불에 타게 되는 것이다.

스물다섯 살이 되었을 때, 이 이상한 사람 마니는 자신의 사상을 모든 인류에게 설파하겠노라고 장담했다. 먼저, 인도와 중국을 방문했는데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마니가 성공을 거두자 수입원을 잃게 된 페르시아 승려들은 마니를 박해하고 죽였다. 하지만 마니교는 붕괴되지 않았다. 선지자의 사상은 빛가루가 되어 유럽과 아시아 땅으로 멀리멀리 흩뿌려졌다.”

그렇다면 종교적 성향이 강했던 청년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떻게 마니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마니교에 입교하기 위해서는 짧지 않은 입교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20세에 ‘듣는 자’ 단계로 입교한 후, 9년이 지나도 다음 단계인 ‘선택된 자’로 승급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돌연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다. 그 과정에 대해서는 내막이 불분명하다. 이와 관련해 폴 존슨은 「기독교의 역사」에서 두 가지 가설을 제시한다.

첫 번째 요인은 ‘건강문제’다. 그에게는 심신질환(심리적인 원인으로 신체에 일어나는 병적인 증상)이 있었는데, 이러한 건강 결핍은 마니교 교리에 따르면 악에 사로잡힌 사람이 보이는 특징 중 하나였다.

두 번째 요인은 밀라노의 주교 성 암브로시우스의 영향이다. 삶의 진리를 깨닫고 영적인 해방을 원하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암브로시우스는 명확한 해답을 제시했다고 전해진다. 교회는 이 과정에서 성령께서 함께했다고 믿고 있다. 그렇게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우스의 추종자가 된 아우구스티누스는 고향인 아프리카로 돌아와 자신의 신앙을 실천에 옮기고, 동시에 신앙적 사유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당시 기세를 떨치고 있었던 이단들의 주장에 대항하기 위해 철학적으로 신앙을 정립한다. 이때 저술된 그의 저서들은 이후 가톨릭 신학의 주춧돌이 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있었던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논쟁’은 우리나라 조선 시대 이황과 기대승의 이른바 ‘사칠논쟁’(四七論爭)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유명한데, 이야기 위주로 전개되는 이 원고에서는 그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자 한다. 그리스도교 신학 정립 역사에 대해 궁금한 독자라면 이 부분에 대해별도로 자세히 들여다 보기를 권한다. 성적인 문제에 대한 관대함, 해방된 인간을 강조한 펠라기우스적 주장과 인간을 무력한 아이로 보고 절대적으로 하느님께 의존해야 한다는 종교적 엄격함을 견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 불꽃 튀며 맞붙는 그 지점이 흥미진진하다. 이 논쟁에서 아우구스티누스 주장의 핵심은 하느님의 은혜가 인간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이다. 특히 그가 정립한 ‘죄’ 및 ‘악’과 관련한 사유는 오늘날에는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인식의 도약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은 선의 결핍이라고 여겼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악용하여 세상의 악한 일들이 일어났으며, 악은 더 큰 선을 위한 디딤돌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입장은 토마스 아퀴나스로 이어졌고, 오늘날 우리도 이 논증을 기반으로 사유하고, 믿는다. 이밖에도 죄와 벌, 구원 등 대부분 우리가 믿고 있는 교리가 상당 부분 아우구스티누스에 기원을 두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교회의 위대한 스승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처럼 이단에 대적해 그리스도교의 주춧돌을 놓고, 정통 신앙을 수호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러나, 생애 마지막 순간에 혼란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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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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