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인류에 비할 수 없이 나이가 많다. 지구의 나이를 1년으로 잡는다면, 인류는 12월 31일 밤 11시 26분경에 태어난 정도다. 이제 겨우 30분 남짓 산 셈이다. 인간은 지구의 시작과 활동을 본 적이 없다. 지구라는 모태에서 주어진 생명의 원리에 맞게 살아왔을 뿐이다.
그런데 불과 100여 년 전부터 인간이 지구를 급격히 흔들기 시작했다. 인간이 자기 삶의 조건인 지구의 환경을 바꾸고, 그 바뀐 환경에 다시 영향받으며,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지경에 처했다. 지구의 지질 구조 안에서 살던 인간이 지구의 지질 구조를 바꾸는 행위자로 등장한 것이다.
이제는 지구가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다는 진단이 나왔다. 인간이 기후 변화를 일으키고, 생물 다양성을 급격히 감소시키는, 전에 없던 변화의 동인이 된 것이다. 자연 안의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자연을 바꾸게 되었을까.
인류의 조상은 언젠가 마른 나뭇가지를 비벼 불을 일으키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불이 일어나는 일은 자연법칙에 따른 것이다. 물질들이 서로 부딪치면 마찰열이 생기고 불까지 일어나는 것은 자연법칙이다. 그러나 인간의 손에서 일으킨 불은 인간이 추상화한 자연법칙의 효과이다.
인간은 자연법칙을 하나의 방법으로 표준화하고 기술로 만들어 다른 이에게 전수한다. 고기를 굽고 집을 데우기 위해 불을 일으키고 어둠을 밝히는 기술로 밤을 낮처럼 산다. 자연법칙을 자신의 의도에 맞게 조작하면서, 인간은 자신을 자연의 통제자로 인식했고, 그 과정에 문명도 발생했다. 그리고 자연법칙을 수단화하면 할수록 문명도 정교해졌다.
물론 문명도 자연법칙에서 찾은 기술의 작품이다. 수백 톤 되는 철 덩어리가 하늘을 나는 것도 자연법칙을 통제하면서 만든 기술의 효과이다. 철이 바다 위를 다니게 되는 것도 자연법칙을 조작한 결과이다. 그러나 비행보다 더 큰 자연법칙은 추락이다. 추락이 더 심층적 자연법칙이다. 바다 위의 배는 언젠가 가라앉게 되어 있다. 가라앉아 삭아가는 것이 더 심층의 자연법칙이다.
그렇게 인간이 자연법칙에서 찾아낸 기술은 언제나 더 큰 더 심층의 자연법칙의 도전을 받고 있다. 인간이 일으킨 기후 변화로 무수한 생명이 신음하고 있고, 인간도 신음하고 있다. 더 심층의 자연이 인간에게 도전해 오고 있다.
당연한 사실이거니와, 땅이 인간보다 먼저 있었다. 성경에서도 풀, 나무, 물고기, 새, 동물, 당연히 곤충과 미생물이 인간보다 먼저 있었다고 하지 않던가.(창세 1,1-25 참조) 그런데 지구에서 겨우 ‘30여 분’ 밖에 살지 않은 인류가 앞선 생명 전체를 수단화하며 지구의 질서를 흔들어 왔다. 급기야 생명체의 여섯 번째 대멸종이 시작되었다는 연구도 나오고 있다. 심각한 현실이다.
이때 다음과 같은 성경의 질문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욥기 38,4) 지구의 시작을 보지 못한 인간이 지구를 다 안다는 듯, 원래부터 인간의 것이었던 양 행동하다가, 급기야 인간이 거의 신처럼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 결과는 무엇인가.
이때 그리스도인에게는 퍼뜩 이런 경각심이 든다. 2000년 이상 ‘하느님 나라’에 대해 말해 왔는데, 왜 세상은 무수한 생명을 짓밟는 ‘인간의 나라’로 치닫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하느님 나라’조차 인간 중심으로 사유하며 하느님의 자리에 자신을 세워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다.
그렇다. 신앙과 신학의 방향을 재설정해야 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는 물론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닫힌 ‘실선’에서 열린 ‘점선’으로 바꾸어야 한다. 상생적으로 소통하며, 생명의 다양성을 살려야 한다. 인간의 토대인 땅의 유기적 생명 원리를 다시 보아야 한다. 창조의 원리를 되새기고 창조물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급격한 추락보다 상처가 덜한 연착륙의 길을 열어야 한다. 그것이 인류 최후의 과제다.

글 _ 이찬수 박사(종교평화학자, 가톨릭대학교 강사)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강남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연구교수, 보훈교육연구원장 등을 지냈다. 신학, 불교학, 철학을 중심으로 이십여 년 종교학을, 십수 년 평화학을 연구했으며, 「인간은 신의 암호」, 「평화와 평화들」 외 단행본 100여 권을 출간했다. 현재 아시아종교평화학회 부회장이며, 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에서 평화학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