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필사한 지 벌써 30년이 지났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부산에서 군 장교로 근무하던 시절 군종신부님이 저녁 주일미사 강론을 통해 “개신교에서는 많은 신자가 성경을 필사하는데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무턱대고 문방구에 들려 새 만년필과 잉크를 구입했다.
그런데 막상 집에 돌아와 성경을 펼쳐보니 깨알 같은 작은 글씨에 기가 질렸다. 늘 보던 성경의 글씨가 이렇게 작았던가! 그래도 한 번 베껴볼까? 그렇게 막연하게 시작한 성경 필사다. 그로부터 2년 2개월의 시간이 흐른 뒤 신약과 구약 모두를 필사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성경을 필사하는 일정한 양식도 없었고, 주교님의 축복장 수여 여부도 몰랐다. 일반 노트에 성경을 베끼는 것이 불경스러워 나름 예의를 갖추어 검은색 작은 바인더 노트 위에 새 만년필로 한 자 한 자 베낀 것이 모두 13권이다. 그리고 성경별로 시작 전후에는 주모경을 바쳤다. 필사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기도의 덕분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필사를 마쳤을 때 신부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개신교에서 성경 필사를 마친 사람은 간증(干證)을 하는데 형제님도 한번 하실래요?” 내가 극구 거절했더니 몇 주 후에 신부님은 좋은 만년필을 선물해 주셨다. 군 생활로 인한 잦은 이사 때도 필사본은 늘 잊지 않고 챙겨 다녔다.
초서(抄書)는 곧 ‘베껴 쓰기’다. 눈과 마음으로 읽는 것보다 손을 움직여 베껴 쓰다 보면 방금 전의 희미해진 기억도 곧잘 떠오른다. 나는 아직도 30년 전에 필사한 성경의 여러 구절이 떠오른다. 특히 시편이 그렇다. 이것이 베껴 쓰기의 힘이다. 성경 필사의 힘이다.
독서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굳이 방법을 논할 것은 없지만 사람에 따라, 취향에 따라 각각 다르다. 한양대학교 국문학과 정민 교수는 가톨릭신문에 기고한 ‘초서의 힘’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글을 쓰다가 생각이 막히면 나는 빈 종이를 꺼내 초서를 시작한다. 문득 예전 읽었던 글을 찾아 베껴 쓰기도 하고, 논문을 준비 중인 글을 다시 베껴 쓰기도 한다. 또박또박, 따박따박 베끼는 동안 글과 대화하고, 글쓴이의 생각 속에서 헤엄친다. 그러고 나서 그 아래에 내 생각을 다시 메모해 둔다. 서류봉투의 뒷면이나 포장지의 뒷면에 적은 메모가 묘목이 되어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큰 나무로 자라난다.”
성경 필사 후 나는 한국천주교회사를 연구하면서 많은 책을 컴퓨터에 통째로 입력했다. 필사 대신 선택한 방법이다. 원고지 7000매가 넘는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를 비롯해 천주실의, 칠극, 사학징의, 벽위편, 주교요지, 추안급국안, 백서, 수기, 상재상서 등 모두 32권이다. 한국천주교회사를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주옥같은 서책들이다.
컴퓨터를 검색하면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물론 그때그때 필요한 메모도 기록해 놓았다. 성경 필사처럼 손으로 베껴 쓴 것이 아니고 눈으로 읽으면서 손가락으로 책을 베낀 것이다. 베껴 타자를 쳤으니 초타(抄打)라고 하면 될까!
가끔 필사한 성경 노트를 꺼내본다. 많은 세월이 흘러서인지 종이의 색깔도 내 나이와 같이 누렇게 변했지만, 그때마다 내 필체의 온기를 느끼게 되고, 베껴 쓴 글자와 대화를 하면서 세월의 향기에 푹 젖기도 한다. 지금도 정성을 다해 성경을 필사하는 모든 분에게 박수와 경의를 표한다.
글 _ 박용식 스테파노(수원교구 북여주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