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지방으로 자문하러 가던 길이었다. 차가 많지 않은 고속도로를 달리며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주님의 기도를 외우던 중,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문장이 마음을 스치는 순간, 뜻밖에도 서울 명동밥집의 노숙자들이 떠올랐다. ‘이곳에서는 헐벗고 배고프며 고생하지만, 하늘나라에 가면 주님께서 풍성하게 대접해 주시겠지.’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가 곧 멈춰 섰다.
‘하늘에서’만이 아니라,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기도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정년 퇴임을 한 뒤,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자주 스스로에게 묻던 때였다. 그 순간 문득, 내가 평생 몸담아 온 전공이 떠올랐다. 식품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식품 회사에 도움을 청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묵주기도를 잠시 멈추고, 오늘 찾아가는 회사 대표에게 이야기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17가지 농산물과 수산물을 동결 건조해 만든 코인 육수 제품을, 코인 형태가 아닌 대량 단위로 공급한다면 쓰레기도 줄고, 시간도 절약되어 많은 사람에게 국을 손쉽게 제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대표이사님은 흔쾌히 무상 제공을 약속해 주셨다. 처음엔 주당 6~700명이던 식사가 해가 바뀌며 2400여 명으로 늘어났음에도 3년 동안 변함없이 무상 지원해 주셨다. 지금도 그 고마움은 마음 깊이 남아 있다.
이후 커피 회사에서는 커피믹스를, 제과 회사에서는 초코파이를, 라면 회사에서는 컵라면을, 두부 회사에서는 두부와 콩나물을, 만두 회사에서는 설날에 최고급 만두를, 장류 회사에서는 된장, 간장, 쌈장, 식용유, 꽁치통조림 등 각종 양념류를 무상으로 제공해 주었다.
흥미로운 일도 있었다. 양념류를 제공해 준 회사의 관계자는 제자였는데, 금액이 많지 않다며 회사에 보고 없이 개인적으로 처리했던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모른 채, 감사의 뜻으로 제품 사진과 함께 SNS에 글을 올렸다.
이를 본 회사 대표는 “왜 이런 일이 보고되지 않았냐”며 깜짝 놀랐고, 나중에 제자의 소행(?)임을 알고는 “이런 일은 회사 이름으로 처리하라”며 오히려 칭찬했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전무로 승진했다. 기쁘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재직 시절 함께 일했던 학교 직원은 자신의 텃밭에서 수확한 채소를 기증하고 싶다며 연락해 줬고, 그 채소들은 정성스럽게 포장되어 명동으로 향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의 마음이 모이자 명동밥집에는 먼 곳에서 찾아오는 이들도 생겼다.
어떤 노숙자분은 밥을 여러 그릇 드시기에 “이렇게 많이 드시면 탈이 납니다” 하고 말씀드렸더니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몰라서요”라고 답하셨다. 두 시간이나 전철을 타고 와 아침 10시부터 배식을 기다렸다고 했다.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분들에게 명동밥집은 마치 지병을 고치고 싶어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길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날 문득,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이 기도가 아니라 현실로 다가왔다.
글 _ 노봉수 야고보(서울여자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