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에는 묘한 힘이 있다. 거리에는 불이 켜지고 카페에는 캐럴이 흐르며 로비마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진다. 그리고 성당에는 구유가 놓인다. 무엇보다 공기 속에 어떤 기대감이 느껴진다. 무언가 큰 일이 곧 일어날 것 같은 기다림이다. 그 기다림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오심이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사건보다 더 큰 일이 또 있을까.
하지만 해가 갈수록 성탄을 준비하던 장식과 불빛은 기다림을 돕는 표지가 아니라 소비를 자극하는 장치가 되고 있다.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을 사게 하고, 남은 예산을 다 쓰게 만든다. 물론 축제는 축제답게 기념해야 한다. 선물이나 특별한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기쁨은 나누라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누구를 중심에 두고 기뻐하느냐이다.
우리가 따르는 분은 가난하게 태어나셨고 가난하게 사셨으며 가난하게 돌아가셨다. 예수님의 가난은 비참함이 아니라 매력이었다. 사람들이 그분 곁으로 모여들었다. 동시에 그 가난은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이기도 했다.
몇 달 전 ‘가장 인기 없는 미덕’에 대해 칼럼을 썼다. 순결이 그렇다면 가난함이나 청빈의 정신 역시 인기 없는 미덕의 최상위권에 있을 것이다. 오늘날 성공은 통장 잔고로 판단되고 유행을 따르는 옷차림으로 평가되며, 최신 기기와 여행 횟수·SNS 팔로워 수로 증명된다. 이 사회는 부로 보상하고, 가난으로 처벌한다. 가난한 이들이 받는 가장 큰 처벌은 무관심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에 이어 레오 14세 교황 역시 이 주제를 끊임없이 되짚는다. 최근 교황의 사도적 권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Dilexi te)는 단순한 사회적 메시지가 아니다. “나는 가난한 이를 사랑했다”는 고백이자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예수님을 다시 바라보자. 아무것도 없이 오셨고 손으로 일한 대가로 사셨으며 묻힐 무덤조차 없이 세상을 떠나셨다. 과거에는 가난이 삶의 조건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청빈은 강요된 운명이 아니라 선택 가능한 길이다. 그래서 더 어렵고 동시에 더 자유로운 선택이다. 그럼에도 교회 안에는 의도적으로 그 길을 택한 이들이 늘 존재해왔다. 그들의 청빈은 사람을 끌어당겼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유행을 따르는 지도자나 ‘멋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두 가지로 나눠보고 싶다. 개인적 청빈과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삶이다. 먼저 개인적 청빈이다. 우리는 세상 한가운데서 산다. 옷도 필요하고 전화기도 필요하며 교통수단과 음식도 필요하다. 문제는 ‘필요’가 아니라 ‘과잉’이다. 없어도 되는 것을 과감히 내려놓는 연습이다. 삶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면 하느님은 어디로 들어오실 수 있을까. 우리가 청빈의 정신을 지향하는 이유는 예수님처럼 살고 싶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일이다. 오늘날 가난은 외로움에 갇힌 이들, 중독과 싸우는 이들, 병상에 있는 사람, 감옥에 있는 이들까지 포함한다. 가난한 이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는 삶 안에서 응답해야 할 질문이다.
레오 14세 교황은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메시지에서 “가장 큰 가난은 하느님을 모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가난한 이를 돌본다는 것은 단지 물질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전하는 일이기도 하다. 가난은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사랑으로만 가능하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먼저 하느님 사랑을 받아들여야 한다.
성탄이 개인적 기쁨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누군가에게 시간을 내어주는 선택, 작은 나눔에서 예수님의 가난을 다시 만나는 성탄이기를 바란다. 가난한 예수님 안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