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용·최기주 부부 100억 기부
이상각 신부(앞줄 오른쪽 다섯 번째), 최기주 여사(앞줄 오른쪽 여섯 번째) 가족들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장남 이상현 회장(뒷줄 오른쪽 다섯 번째)과 차남 이상훈 부회장(앞줄 왼쪽 세번째)은 선대의 뜻을 이어 기부금 1000억 원을 채우겠다고 밝혔다.
“이렇게 성스럽고 아름다운 남양성모성지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페터 춤토르(Peter Zumthor)의 ‘티 채플’(하우스)을 봉헌하도록 허락해주신 하느님과 성모님, 그리고 이상각 신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4일 수원교구 남양성모성지 대성당. KCC 오토그룹/정보통신, 시스원 이주용(요셉, 91) 명예회장의 부인 최기주(소피아 바라, 83) 여사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렸다. 부부는 남양성모성지에 건립될 ‘티 채플’ 건립기금으로 100억 원을 쾌척했다.
앞서 이들은 150억 원을 출연해 세운 ‘미래와 소프트 재단’을 비롯해 서울대 문화관 리모델링 기금, 서울대병원 발전기금 등을 냈다. 이번에 기부한 돈을 합치면 910억 원에 달한다.
그동안 기부는 “내가 가진 예금·주식 등 1200억 원 중 절반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했던 남편 이주용 명예회장이 주도했지만, 이번엔 육당 최남선 선생의 장손녀인 부인 최기주 여사가 결심했다. 이 명예회장은 지난해 말 염수정 추기경에게 병자성사를 받을 만큼 건강이 좋지 않다.
“새해를 준비하던 작년 12월 27일 집에서 저녁을 먹게 됐어요. 그날 큰딸이 ‘엄마, 하느님한테 가시기 전에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이런 기회가 아무한테나 오는 게 아니에요’라며 얘기를 꺼냈어요. 큰아들한테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했더니 그 정도 돈은 된다고 해요. 그래서 남양성모성지 후원회장인 이종사촌 동생(이성우 성은실업 대표이사)을 통해 이상각 신부님께 그 뜻을 전했죠. 그리고 남편 귀에 대고 그걸 얘기했더니 잘했다고 엄지를 치켜드시는 거예요.”
이로써 남양성모성지에는 마리오 보타(Mario Botta)가 설계한 대성당에 이어 스위스의 세계적 건축가 ‘페터 춤토르’가 설계할 ‘티 채플’(Tea Chapel)이 자리하게 된다. 춤토르는 2009년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 수상자로 ‘건축가들의 건축가’ ‘건축가의 시인’으로 불린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쉽게 설계를 맡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2012년 마리오 보타의 소개로 춤토르를 만난 이 신부는 “상처받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남양성모성지에 특별한 치유를 경험하게 하고 싶다”며 작은 경당을 짓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답을 하지 않았던 춤토르는 2년 뒤인 2014년 방한해 성지를 둘러봤고, 종교적인 건물을 더 짓기보다 하느님을 만날 특별한 공간을 만들자고 했다.
1월 4일 남양성모성지 성당에서 최기주 여사가 100억 원을 기부를 하게 된 경위를 전하고 있다. 티 채플 건축에 100억 원을 기부하기로 한 것은 최 여사의 결심과 자녀들의 지지, 그리고 남편 이주용 명예회장의 격려가 있었다.
“당시 춤토르는 혼자 2시간 넘게 현장을 둘러본 뒤 ‘영적인 체험을 꼭 경당과 같은 종교적인 건물 안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 ‘하늘을 바라본다든지 바람을 느끼는 것과 같은 아름다운 자연 안에서, 그리고 훌륭한 건축물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공간에서 얼마든지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영적인 체험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티 채플은 영적이며 명상적인 공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이상각 신부)
그 후 두 차례 더 현장을 방문한 춤토르는 10년 동안의 설계를 마치고 2023년 공사를 시작하자고 했지만, 정작 이 신부에겐 이를 추진할 공사비가 없었다.
이 신부는 건축 기금 마련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지난 2년간 기업가, 성공한 벤처인, 변호사, 의사 등 대한민국의 성공한 리더들에게 부탁했습니다. 첫 마중물은 1억 원을 낸 개신교 신자였지만, 돈은 쉽게 모이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2025년이 다 가기 전에 기적이 일어난 겁니다.”
이 신부는 이날 거동이 어려운 이 명예회장을 제외한 최기주 여사, 장남 이상현(미카엘) KCC오토그룹/정보통신 회장, 차남 이상훈(야고보) 시스원 부회장 등 가족 모두를 초대해 성지 내 티 채플 예정 부지로 안내했다. 이 신부는 “티 채플은 84개의 기둥, 아파트 5층 높이에 냉난방이 없는 ‘노 에너지 시스템’으로 지어질 것”이라며 “가능한 한 내년 상반기에 공사를 끝내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에 많은 젊은이가 찾는 장소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곳이 새로운 복음 선포의 장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 신부는 “페터 춤토르의 건축물이 아시아에 세워지는 건 이곳이 처음”이라며 “건축의 세계적 두 거장 마리오 보타의 대성당과 페터 춤토르의 티 채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건축가 승효상의 순교자 언덕, 젊은 건축가상을 받은 이동준의 엔드리스를 한곳에서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문화와 예술의 시대에 앞으로 많은 사람이 찾아와 이곳에서 예수님,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도 선임기자 raelly1@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