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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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끝에는 언제나 열려 있는 창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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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희망을 이야기하기 힘들 때는 어떻게 해요? 선생님 글은 가끔 너무 착해서요, 그 힘은 어디서 나오나요? 욕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요?” 


이 질문을 학생이 했을 때, 저는 좀 뜨끔했습니다. 학생이 정말로 하고픈 말은 조금 달랐을 것 같아요. 절망보다 희망을, 슬픔보다 기쁨을, 비판보다 격려를,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견지하는 태도가 젊은이들에겐 가끔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감수성이 면도날처럼 예리한 학생들은 가끔 날 것의 절규를 내지르고 싶을 때가 있을 테니까요.


솔직한 소감을 말해주는 학생이 그래서 저는 고마웠습니다. 제가 말했어요. “글이나 말은 어느 정도 상대적이어서 듣는 이를 생각해야 하거든. 욕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시간의 시험을 거치며 남는 글은 좀 다르게 쓰고 싶어. 그리고 착함은 얼핏 힘없어 보여도 결국에는 이기는 굳센 힘이 돼.” 


그 이후 저는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에 대해 더 곰곰 오래 머물러 생각하곤 합니다. 눈물보다는 웃음, 절망보다는 희망, 죽음보다는 삶, 더 바람직하다고들 말하는 삶의 태도들이 정말로 늘 답인가 질문하면서요.


큰 슬픔을 지나며 이런 생각을 해보았어요. 죽음이 있기에 삶이 삶다워질 수 있고, 절망이 있기에 희망이 있고, 눈물이 있기에 웃음이 있고, 슬픔이 있기에 기쁨이 있다고. 그래서 가늠할 길 없는 슬픔에 더 보탤 말이 없으니 다만 기도한다는 말씀이나, 슬플 때는 빨리 벗어나려고 너무 애쓰지 말고, 충분히 슬퍼하라는 말이 큰 힘이 되었어요. 상실을 극복하려는 마음도 버리라고, 아버지를 여의는 일은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이 당면해야 하는 슬픔이기에 그를 부정할 수 없다고, 본향으로 돌아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기쁨에 앞서 그 슬픔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저보다 먼저 겪은 경험을 통해 건네주시는 위로의 말들 속에서 저 또한 깊이도 너비도 모를 이 별리의 터널을 잘 지나고 있습니다.


폴 엘뤼아르의 시 <그리고 미소를>에 이런 구절이 나와요. “슬픔의 끝에는 언제나 열려 있는 창이 있고.” 슬픔을 나누는 일은 곡진한 감정의 골을 함께 지나는 일, 그래서 슬픔의 끝을 맞잡은 이들은 결국 열린 창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 슬픔의 끝은 그러므로 다른 세계, 다른 존재를 이해하는 또 다른 열림으로 이어진다는 것, 열린 그 창에 불이 하나씩 켜질 때 우리는 더 깊은 연대와 공감을 나누는 존재들이 된다는 이야기.


“선생님, 저는 아직 그 슬픔을 충분히 알지 못하지만, 죽음이라는 사건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지나야 하는 마지막 시험인 이상, 그 시험을 몸소 지나는 일도 그걸 지켜보는 일도 쉽지 않음을 희미하게 알 것 같아요. 그러니 더 힘들어하시고 슬퍼하셔도 됩니다.” 


어린 학생이 건네는 조심스러운 위로를 통해서도 슬픔이 열어주는 불 켜진 창을 마주하네요. 그렇게 저는 또다시 말에 기대어 함께 나누는 삶 안으로 한 걸음 나아갑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그런 힘으로 이 혹독한 시간을 지나오셨겠지요. 연약한 인간은 이로써 더 단단해지고, 관대하고 너른 인간으로 자라게 되는 것이겠지요. 이게 삶이겠지요.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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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6-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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