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는 생각보다 중요하다(Realities are more important than ideas).”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음의 기쁨」 231항에서 했던 권고이다. 이 권고문의 의미는 ‘실재가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실재(Reality)에 대한 이해는 다양하다. 플라톤에게 실재는 인간이 감각으로 포착하는 사물 너머의 세계, 영원불변한 원형의 세계이다. 사람에 의해 감각된 것은 실재의 그림자일 뿐이다. 칸트에게 실재는 인간의 인식을 넘어서는 ‘물 자체’로서 인간의 인식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이다.
존 로크나 데이비드 흄과 같은 경험론자에게 실재는 인간의 직관적 경험을 통해 관찰되는 물리적 세계이다. 경험되지 않은 것, 경험될 수 없는 것은 실재가 아니다. 귤의 모양, 색깔, 냄새, 맛과 같은 감각의 재료들이 모여 귤이라는 실재를 구성한다는 식이다.
현상학자인 에드문트 후설에게 실재는 인간의 의식이 지향하는 어떤 대상이다. 같은 벽돌인 것 같지만, 목수에게는 집 짓는 재료가 벽돌의 실재이고, 누군가를 해치려는 강도에게는 살상 흉기가 벽돌의 실재이다.
최근 ‘사변적 실재론’을 주장하는 철학자 퀑탱 메이야수에게 실재는 인간의 인식 여부와 관계없이, 인간 이전부터 그냥 그렇게 존재하는 거대한 세계이다. 가령 지구야말로 인간이 있기 전부터 인간의 의식과 관계없이 그냥 그렇게 존재해 온 절대 실재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이런 실재론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더 현실감 있는 실재론을 견지한다. 하느님과 창조 세계 전체, “해와 달, 전나무와 작은 꽃 한 송이, 독수리와 참새, 이들의 무수한 다양성과 차별성의 장관”(「찬미 받으소서」 86항)과 같은 구체적 세계 전체이다. 이들은 하늘과 땅과 바람과 물과 인간과 끝없이 연결되어 있다. 지구, 태양, 우주도 인간이 있기 전부터 있는 거대한 실재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을 예외로 두고서 하느님의 창조 세계를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취사선택하는 주체 노릇을 한다. 내가 다 안다는 듯 재단하고 평가하면서 나의 인식 안으로 밀어 넣는다. 얕은 생각으로 다듬은 고안물인데 그것이 진짜 실재인 것처럼 밀어붙인다.
“하느님은 사람을 단순하게 만드셨는데 사람들은 공연히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공동번역 전도 7,29)는 성경이 이런 현실에 딱 맞는 경고이다. 이와 관련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실재는 그냥 있지만 생각은 다듬어진다”는 말로, 인간이 실재를 추구한다면서 정작 실재로부터 멀어져가는 현실을 경계한다.
모든 실재(Realities)는 연결되어 있고, 연결된 전체도 실재(Reality)이다.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다.”(공동번역 로마 11,36) 그중에 귀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만의 생각으로 이들을 다듬고, 제 기준에 따라 우열을 나누고, 열등하다며 배척하고 상처를 주고 하느님의 세계를 가린다. 그러면서 생명들의 질서는 파괴되고, 운동장은 더 기울어진다.
프란치스코 교황에게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신음하는 약자들의 고통이 생생한 실재이다. 당연히 이런 실재를 가리는 수단들은 거부해야 한다. 십계명에서 ‘살인하면 안 된다’고 말하듯이 “오늘날 우리는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는 안 된다”(「복음의 기쁨」 53항)고 말해야 한다.
그렇게 인간의 편협한 생각에 가려진 하느님의 실재를 회복해야 한다. 그러려면 응당 실재와 그 실재에 관한 생각 사이에 지속적인 대화가 있어야 한다. 말만 내세우는 세계, 이미지나 궤변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다.(「복음의 기쁨」 231항 참조)
실재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뭇 생명, 비인간 존재도 서로를 향하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향한다는 근원적 사실을 두루 구체화해야 한다. 그것이 “실재가 생각보다 중요하다”는 메시지에 담긴 구원의 길이다.
글 _ 이찬수 박사(종교평화학자, 가톨릭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