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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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향숙 평화칼럼] “주님, 저를 안고 계십니까?”

송향숙 그레고리아(생활성서사 교재연구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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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꼭 해낼 거야.” 새해 다짐이 입가에 남아있는데 이마 위로는 재가 내린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여라.” 설날과 재의 수요일이 포개지는 이 묘한 겹침 앞에서 7년 전 세상에 내놓았던 책 한 권을 꺼내 든다. 「나이듦의 품격」.

이 책은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만났는데, Vesper Time(저녁 기도 시간)이라는 제목이 내 시선을 붙들었다. 어둠이 내리기 직전 등불을 켜고 바치는 저녁 기도처럼 노년은 삶의 분주함을 내려놓고 비로소 인생을 깊이 음미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저자 프랭크 커닝햄은 평생 출판 편집자로 글을 다듬으며 살다가 인생 황혼기에 이 영성적 성찰을 기록했다. 같은 일을 해온 내게 이 책은 묘한 동질감과 위안을 주었다.

그럼에도 제목을 ‘저녁 기도 시간’이라 할 수는 없었다. 전원만 켜면 24시간이 대낮이고, 스마트폰 불빛이 새벽 3시에도 얼굴을 비추는 세상. 밤이 사라진 자리에 ‘저녁’이라는 시간도 함께 증발해버렸다. 그래서 원서의 정신을 살려 「나이듦의 품격」이라 했다. 출간 뒤, 미국에 사는 친구가 원서를 사려고 서점에 달려가 “‘The Elegance of Aging’ 주세요!”라고 했다가 “그런 책은 없습니다”라는 답을 들었단다. 번역서 제목이 원서보다 멋지다는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저자는 노년의 일상을 유쾌한 유머로 풀어낸다. 어르신들이 만나면 위장은 어떻고 무릎은 어떤지 서로의 병력을 세세히 늘어놓으며 웃는데, 저자는 이 풍경을 ‘장기 자랑(Organ Recital)’이라 부른다. MZ세대가 처음 만나면 MBTI를 묻듯, 어르신들은 장기(臟器)로 대화의 물꼬를 튼다. 그런데 저자가 짚는 핵심은 따로 있다. 자신의 약함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진짜 관계의 시작이라는 것. 완벽하게 꾸며놓은 모습만 보여주느라 지친 이 시대의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이 책은 노년을 품위 있게 건너는 다섯 가지 열쇠를 건넨다. 기억·친밀·쇠약·감사·수용. 열쇠마다 깊은 이야기가 담겨 있지만, 첫 열쇠 ‘기억’의 한 장면만을 꺼내본다. 젠코 신부는 1985년 레바논에서 납치되어 19개월간 구타와 격리, 사슬에 묶이는 등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가장 잔혹한 보초 ‘사이드’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으로 가득했다. 사이드는 점차 젠코 신부를 ‘아부나(존경하는 아버지)’라 부르며 변화했고, 석방 직전에는 용서를 청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서로의 잘못을 고백하며 함께 울었다. 젠코 신부는 용서란 과거를 잊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치유하여 진정으로 해방되는 과정임을 보여줬다. 고통의 기억을 하느님 은총을 들여다보는 창으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나이 듦이 빚어내는 거룩한 연금술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이 건네는 지혜는 어르신들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남들 SNS를 훑으며 다들 어디론가 나아가는 것 같은데 나만 멈춰있다고 느끼는 조바심, 스펙·취업·주식·집 등 무언가를 이루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라 여기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사는 이들에게 저자는 말한다. “기다림은 단순한 정체가 아니라, 씨앗이 싹 트기를 기다리는 수태 기간과 같다.” 흙 속의 씨앗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가장 치열한 변화가 일어난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게 없는 날, 아무 성과도 없어 보이는 그 시간이 어쩌면 가장 깊이 뿌리내리는 시간인지 모른다.

이번 사순 시기, 이 책의 저자와 함께 조용히 물어보자. “주님, 저를 안고 계십니까?” 내가 먼지에서 왔음을 인정하는 그 겸허한 자리에서 역설적으로 하느님의 숨결이 가장 가까이 닿는다. 그 숨결이 닿는 곳에서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진다.(2코린 4,16) 흙의 먼지로 나를 빚으시고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신 그분이, 올해도 나를 안고 계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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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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