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학년에서 체급별로 씨름을 잘 할 것 같은 메이저 선수들과 함께 가장 씨름을 못할 것 같은 마이너 선수들의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신학교의 씨름대회는 씨름왕을 뽑겠다는 목적보다는 전교생이 한바탕 웃고 즐기기 위한 의미가 더 강했다. 이런 이유로 이 대회의 관전 포인트는 아무래도 어설픈 마이너 선수들의 경기에 쏠려 있었다. 약골 선수들의 경기는 전교생들에게는 재미와 흥미를 가져다 주기에 충분했다. 과학계에서 노벨상과 이그노벨상이 있다면, 신학교에서는 천하장사와 약골장사가 있었던 것이다.
몸이 허약하고 깡마른 마르코는 아니나 다를까 바로 마이너 선수로 선발되었다. 상대방 선수 역시 만만치 않은 약골의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 그야말로 빅매치가 예상되는 순간이었다. 마르코와 상대 선수는 모래경기장에 올라 앉아 샅바를 매고 있었다.
5월의 뙤약볕은 어느새 모래사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학생들은 그늘도 없는 운동장 한 구석의 관람석에서 모두 더위와 갈증으로 지쳐있었다. 하지만 빅매치만큼은 놓치지 않고 관람하겠다는 기세가 역력했다. 모래판에 등장한 상대 선수는 반바지 차림에 속살이 하얀 깡마른 다리를 내놓고 있었다. 그에 비해 마르코는 긴 추리닝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학생들은 그 모습이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여름이라고 꼭 반바지를 입으라는 법은없기 때문이다.
마침내 경기가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상대의 샅바를 힘껏 움켜쥔 채 기싸움을 벌였다. 상대가 먼저 마르코를 자신의 배 앞으로 힘껏 끌어당겨 올렸다. 배지기 기술을 거는 것 같았다. 마르코는 사력을 다해 공중에서 균형을 잡고 버티기 시작했다.
그 순간 학생들은 포복졸도(抱腹?倒)하기 시작했다. 추리닝 바지 속에 빨간 줄무늬 겨울 내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긴 바지까지는 어떻게 이해가 되어도 그 속에 겨울 내복까지는 도저히 말도 안 된다는 표정들이었다. 한바탕 웃음폭탄이 터지는 가운데 마르코는 결국 모래판 위로 나둥그러지고 말았다. 마르코는 3전 2패로 패자가 되었지만, 웃음 보따리를 선사한 그날의 MVP였다.
이 사건 이후로 마르코는 일년 내내 빨간 내복을 입는 공인 약골로 알려졌다. 아무래도 혈기왕성한 학생들이었기에 몸이 허약한 마르코를 재미로 놀리는 일이 많았다. 지금도 그런 이미지가 없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멋진 사나이의 모습은 한겨울에도 내복을 입지 않는 상남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르코가 이 사건 이후로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친구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마르코에게 장난을 걸며 농담을 건네곤 하였지만, 친구들은 모두 마르코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친하니까 신체와 관련된 농담도 서슴지 않았던 것 같았다. 심지어 마르코가 그만 놀리라고 화를 내어도 애교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마르코는 급우들 앞에서 그동안 참았던 감정이 폭발했다. 아침 수업이 시작되기 전 교단에 오른 마르코는 친구들을 향해 울분이 섞인 욕설로 분노를 터뜨렸다. 자신을 더 이상 괴롭히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선전포고였다.
벌써 30년 전 일이라 마르코가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귓가에 또렷이 기억되는 한 가지 말이 있었다. 마르코는 온 몸을 떨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네들이 나를 알아?”
마르코는 그렇게 화를 내고 난 얼마 후 신학교를 홀연히 떠나버렸다. 떠난 자는 더 이상 말이 없지만, 남은 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더 많은 생각을 해야만 했다. 서로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서로 잘 모른다.
부모가 품에서 낳아 길러왔기에 자식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몇십 년을 함께 살아 온 부부이기에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만일 누구와의 관계가 생각보다 힘들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서로가 잘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말과 행동에 더 조심하고 배려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잘 모른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좀 더 상대를 잘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역설이다. 사랑은 서로를 잘 알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잘 모르기 때문에 유지되고 성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_ 박현민 신부
(베드로, 수원교구 중견사제연수원 영성담당, 심리학 박사)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사목 상담 심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상담심리학회, 한국상담전문가연합회에서 각각 상담 심리 전문가(상담 심리사 1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일상생활과신앙생활이 분리되지 않고 통합되는 전인적인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현재 상담자의 복음화, 상담의 복음화, 상담을 통한 복음화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 「상담의 지혜」, 역서로 「부부를 위한 심리 치료 계획서」 등이 있다.
삽화 _ 김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