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유학생들은 과거에 비하면 비교적 안정된 형편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40여 년 전만 해도 유학 생활은 생존 그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여정이었다.
임신한 아내와 함께 떠난 유학길은 시작부터 팍팍했다. 수입은 없고 지출만 이어졌다. 가계부를 쓰던 아내는 어느 날 “이제 더는 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남은 돈이 100달러도 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기록은 위로가 아니라 절망이 되었다.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느냐며 눈물을 보이던 아내 앞에서 나는 달리 해 줄 말이 없었다.
그때 문득 성경 한 구절이 떠올랐다. ‘하늘의 나는 새도 먹여 주시는데, 저 새들보다도 더 귀한 주님의 자녀를 하느님께서 어찌 돌보지 않으시겠는가.’(마태 6,26 참조) 그 말 한마디에 모든 걱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붙잡을 끈 하나는 생겼다. 그 말은 사실 아내에게라기보다, 나 자신에게 건네는 다짐에 가까웠다.
아내는 훗날 그 시절을 ‘창살 없는 감옥’이라 불렀다. 돈이 없으니 어디를 갈 수도 없고, 남편은 공부하느라 늘 바빴다. 아내는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하루하루를 불안 속에 보냈다. 몸은 자유로웠지만 마음은 늘 갇혀 있었다. 보이지 않는 창살이 삶을 둘러싸고 있는 듯한 시간이었다.
주일이 되면 남의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 40분쯤 떨어진 새크라멘토 한인 천주교 공소로 갔다. 교포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고, 식사를 나누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한 주의 유일한 위로였다. 그 만남은 마치 유치장에서 면회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간절했다. 잠시나마 세상과 다시 연결되었다는 느낌이 그 자리에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유학 생활은 광야와도 같았다. 광야는 먹을 것도 부족하고 쉬거나 잠잘 곳도 마땅치 않다. 인간은 그곳에서 가장 나약한 존재로 돌아간다. 의지할 것이 사라질수록, 사람은 하느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다. 광야는 인간의 부족함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자리이자, 동시에 신앙이 가장 맑아지는 자리다.
성경 속에서 광야는 늘 기도의 자리였다. 모세는 광야에서 방황하며 하느님을 찾았고, 예수님 또한 40일 동안 광야에서 단식하며 기도하셨다. 단식은 선택이라기보다, 욕심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만들어 낸 삶의 방식이었다. 광야는 인간의 욕망을 채워 주는 곳이 아니라, 욕망을 비워 내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순절의 단식도 같은 맥락에 있다. 우리는 종종 단식을 절제나 나눔의 실천으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단식의 본래 의미는 그보다 깊다. 단식은 나 자신을 비우고, 온전히 주님께 나아가기 위한 통로다. 신앙인에게 단식은 “주님, 저는 혼자 살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우리 몸의 언어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드리는 기도는 다르다. 계산도 조건도 없다. 그저 주님께 맡기고 매달릴 뿐이다. 사순절의 단식은 우리를 억지로 괴롭히기 위한 규율이 아니라, 스스로를 광야로 이끄는 은총의 길이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던 삶에서 한 걸음 물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시간이다. 지난 시절의 광야 같은 유학 생활은 지금도 내게 단식의 의미를 새롭게 가르쳐 주고 있다.
글 _ 노봉수 야고보(서울여자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