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정신의학자이자 나치의 강제 수용소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 박사는 죽음, 고통, 죄책감은 인간이 결코 피할 수 없는 3대 비극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그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런데, 최근 들어 우리 사회를 시끄럽게 하고 있는 의사조력자살에 대한 논란은 무엇보다 삶의 의미 혹은 고통의 의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영국의 언론인인 케이티 엥겔하트는 「죽음의 격(The Inevitable)」이라는 책을 통해 사람들이 왜 조력자살을 선택하는지 상세하게 조사하여 밝히고 있다. 거기에는 현대 의료가 지닌 한계, 노화, 신체적·정신적 고통 등 다양한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제시되는 것은 바로 ‘자유’였다. 자신의 생명과 죽음까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 때 자신의 삶이 존엄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 역시 인간의 자유를 강조했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의 자유는 고통스러운 삶을 스스로 끝내는 자유가 아니었다. 그는 끔찍한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도 자기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했고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늘 기억했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강제 수용소의 끔찍한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그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삶이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반대로 자신의 자유가 조력자살을 통해 실현된다고 믿을 때, 거기에는 생명의 변함없는 가치도, 삶의 의미도 자리할 수 없다. 삶이 그 자체로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할 때, 고통은 무조건 피해야 할 대상이 되며, 고통스러운 삶은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 된다.
그리스도교는 고통을 그 자체로 소중하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해로운 것을 피하게 하는 경고등의 역할을 한다. 고통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하며 살 수 있다. 의학의 발전 역시 인간을 많은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회칙 「생명의 복음」 23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인간 실존의 피할 수 없는 짐이면서, 동시에 인격 성장에 필요한 요소이기도 한 고통은 불필요한 것으로 ‘삭제’ 당하고 거부당하며, 실제로 언제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피하여야 할 악으로 반대를 받습니다.”
고통은 단지 우리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경고등의 역할을 넘어 우리 각자의 인격 성장에 필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성장 과정은 고통의 연속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은 끊임없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책임을 짊어지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반대로 칼 융이 언급한 것처럼 “신경증(노이로제)이란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을 회피한 결과다.”
생의 말기의 고통은 어떤가? 우리 중 누구도 생의 말기 고통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고통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생의 말기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은 동시에 안락사나 조력자살과 같은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다. 즉, 질병과 고통 중이라도 인간의 생명이 침해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태도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희망과 무관하지 않다.
“모든 인간적 위안을 초월하여, 그 누구도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임종자와 그의 가족에게 주는 커다란 도움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새 의료인 헌장, 148항)
생의 말기의 고통은 어쩌면 새로운 삶으로 태어나기 위한 산고와 같을지도 모르겠다.
글 _ 박은호 그레고리오 신부(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