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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사 속 ‘엄흥도’ 목숨 걸고 순교자 시신 수습한 믿음의 증거자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처럼, 성 김대건 신부 시신 수습한 이민식은 평생 묘지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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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에도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엄흥도 같은 이가 있다.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수습한 이가 바로 이민식 빈첸시오이다.   구글 제미나이 제작

역사의 변방에 서 있던 한 인물이 500년을 건너 오늘, 스크린 속 주연으로 다시 살아났다. 연일 흥행하고 있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엄흥도’(유해진 분)다. 1000만 관객을 바라보는 이 작품은 단종 이홍위(박지훈 분)와 충신 엄흥도의 우정을 극적으로 그려냈지만, 실록과 문헌이 전하는 그의 업적은 단종 사후의 일이다.

‘단종의 시신에 손을 대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서슬 퍼런 분위기 속에서도 엄흥도는 “임금의 시신을 버려두는 것은 차마 볼 수 없다”며 몰래 시신을 수습해 밤을 틈타 등에 지고 산으로 들어가 장례를 치렀다. “옳은 일을 하는 데 해가 될 것이 무엇인가”라는 말을 남긴 그는 단종 복권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그 충절을 인정받았다.


엄혹한 박해시기, 죽음의 위험에도 

한국 교회사에도 엄흥도의 정신과 닮은 이들이 여럿 있다. 엄혹한 박해 시기 죽음의 위험 앞에서도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둬 땅에 모신 평신도들이다.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수습해 미리내성지까지 이장한 이민식(빈첸시오, 1828~1921)이 대표적이다. 김대건 신부의 시신 이장에 관해서는 여러 증언이 있지만, 미리내 북쪽 거문정이에 살았던 이민식의 기록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17세의 미리내 청년 이민식은 포졸들의 눈을 피해 김대건 신부가 치명한 지 40일이 지난 10월 26일 새남터 백사장에서 시신을 수습했다. 고 오기선 신부(1907~1990)가 이민식에게 직접 들은 증언에 의하면, 머리는 품에 안고, 시신은 둘러업은 채 밤길을 걸었다. 낮에는 산속에 숨겨 두고 그 곁에서 묵주기도를 바쳤다. 솔가지로 덮어둔 시신 옆에서 날이 어두워지길 기다리던 그 시간은 얼마나 길었을까. 그렇게 닷새 동안 150여 리를 걸어 미리내에 도착해 자신의 선산에 안장했다. 이후 그는 선산마저 기증하고, 평생 독신으로 묘를 지키며 수도자처럼 살았다. 순교자의 죽음을 지킨 이 헌신은 왕의 곁을 끝까지 지킨 엄흥도에 버금간다.

시간이 흘러 김대건 신부는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모셔지고 있다. 미리내성지까지 이어진 김대건 신부 시신 이장로는 순례길로 조성돼 있고, 성지 내 김대건 신부 묘역 위쪽에는 이민식의 묘소가 함께 자리한다.


기해·병인박해 순교자 시신을 수습한 이들의 업적  

기해박해(1839년)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제2대 조선대목구장 성 앵베르 주교와 성 모방·성 샤스탕 신부의 시신 역시 한강 모래톱에 사흘간 버려져 있었다. 박 바오로는 형제와 아들, 신자들을 이끌고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시신을 수습했다. 교우들은 세 성직자의 시신을 큰 궤에 넣어 노고산(현 서강대학교 뒷산)에 암매장했고, 4년 뒤에는 더 안전한 자신의 선산인 삼성산으로 이장했다. 박 바오로의 아들 박순집(베드로, 1830~1911)의 증언에 따르면, 밤에 순교자 시신을 수습·안장할 때 고의적삼만 걸치고 거적 하나에 시신 2~3구를 싸서 묻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런 식으로 수많은 시신을 장사했다고 한다. 결국 박 바오로를 비롯한 일가 16명은 1868년 순교하기에 이른다.

병인박해(1866년) 때도 마찬가지였다. 새남터에서 순교한 제4대 조선대목구장 성 베르뇌 주교와 동료 성직자들의 시신도 형장에 방치됐다가 박순지(요한 사도) 등 신자들의 손에 거둬졌다. 박순지 역시 우포도청에서 순교했다. 서짓골에 살던 이화만(바오로)과 두 아들은 갈매못에서 순교한 제5대 조선대목구장 성 다블뤼 주교와 동료들의 시신이 모래 자갈 속에 방치되자 인근 야산에 임시 암장했다가 서짓골로 이장했다. 삯배를 이용해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 12일간 운구 작업을 완수한 그들은 시신을 옮긴 사실이 발각되면서 결국 체포돼 순교했다. 정작 자신들의 유해는 남기지 못했다.

천주교 박해 시기(1791~1879년) 동안 시신의 수습·안장 여부가 확인된 순교자는 275명. 이 중 231구가 안장됐다. 죽음을 무릅쓰고 시신을 수습한 이들의 업적이 공개적으로 드러난 경우도 있지만, 기록 속에 조용히 묻혀 있는 이름 없는 신자들도 많다. 뒤에서 묵묵히 희생한 여성들을 비롯한 교우촌 공동체, 그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 교회가 있다.

500년이 지나 주연이 된 엄흥도처럼 한국 교회에도 뒤늦게 빛을 받는 주역들이 있다. 죽은 이를 끝까지 품에 안았던 사람들, 두려움 속에도 ‘옳은 일’을 택했던 이들은 빛나는 순교 자들과 끝까지 함께한 신자들이다. 결국 역사는 이들의 손에서 완성되는지도 모른다.

박민규 기자 mk@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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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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