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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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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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시기를 시작하면서 늘 읽는 시가 있어서 올해도 어김없이 읽어봅니다. T. S. 엘리엇의 <재의 수요일>로, 220여 행에 이르는 긴 시입니다.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기에, 바라지 않기에, 이 사람의 재능과 저 사람의 능력을 갈망하며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기에...”로 시작하는 이 시는 세속의 공간에서 사람들이 이리저리 힘을 쓰며 욕망하는 일에 대해서 서늘한 일침을 가합니다.


바라지 않는다는 말, 시인은 처음에는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기에”라고 하고, 다음 행에는 “바라지 않기에”라고 하고 그리고는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기에”라며 세 번이나 같은 말 “I do not hope”를 반복합니다. 이어지는 다음 연에서도 바라지 않는다는 말은 계속 이어지네요. 이번에는 다시 알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합니다. 무엇을 알고 싶지 않을까요? 확고한 시간의 허약한 영광을 알고 싶지 않다고 하네요.


여기서 확고한 시간은 긍정적인 시간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시간의 허약한 영광이라니. 아마 세속의 시간을 살아가는 모든 이가 믿고 따르는 것이 바로 그 확고한 시간의 허약한 영광이지 않을까 싶어요. 이생이 죽음 없이 계속되리라 믿으며 우리는 악착같이 무언가를 쫓고, 세상 사람들이 다 울어도 나는 괜찮을 것이라며 타인에게 무자비한 상처를 주기도 하지요.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소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추구하고 따르는 수많은 염원에 대해 시인은 왜 이렇게 한사코 마다할까요? 시인은 무엇을 보기 때문에 이렇게 바라지 않는다는 말을 반복할까요? 그래서 가만히 돌아봅니다. 하루하루 우리의 영혼과 정신을 쏙 빼앗는 이 수많은 진단, 현란한 숫자놀음들은 우리 각자의 세속적인 욕망에다 성실과 의무의 옷을 입혀서 근엄하게 부추깁니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고.


추운 겨울 지나고 다시 돌아온 봄, 사순 시기를 보내며 비워야 할 것들을 생각합니다. 눈꺼풀 한 겹 벗고 바라보니, 바라지 않는다는 말, 알고 싶지 않다는 말, 단념한다는 말이 참 좋습니다. 시인은 다시 돌아가기를 바랄 수 없기 때문에 기뻐한다고 하는데요.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얼마나 또 허덕일까요? 얼마나 또 안간힘을 쓰고 몸부림을 칠까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일, 받아들이고 단념하는 일은 그래서 시간 속의 연약한 존재인 인간이 인간됨에 대해 수긍하는 겸허한 자세입니다.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창세 3,19)는 말씀은 더 이상 날 수 없는 날개는 쉬어야 한다는 시인의 말과도 통합니다.


돌아보지 않고, 돌아가기를 희망하지도 않고 앞으로 걷는 일, 어쩔 수 없음을 아는 일은 그래서 절망이라기보다는 선물이고 축복입니다. 걷기조차 힘들면 고요히 앉아 봅니다. 그런 수동성은 사람됨의 허약함을 긍정하는 일인 동시에 인간이기에 행할 수 있는 장한 내적 투쟁이지 싶습니다. 바라지 않는다는 말, 참 좋습니다.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고, 다시 알기를 바라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를 기뻐하며 고요하게, 기도와 함께 지나는 시간, 사순시기의 선물입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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