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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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마당] 가지와 호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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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향은 삼면이 산으로 에워싸여 하늘만 올려다보이는 안동 권가 집성촌이었다. 이른 봄이면 엄마는 호미를 들고 산과 들로 일을 나가셨고, 넉넉지 않은 살림에 야산을 개간해 고추와 고구마를 수확했다.


엄마는 가끔 어린 내게 “안동 권가 양반 집에 속아서 시집왔다”며 신세타령을 하셨다. 반면 아버지는 고된 농사일보다 산천의 풍류를 즐기던 감성적인 분이셨다. 산과 들에서 고사리와 버섯을 채취하거나 미꾸라지를 잡아 오곤 하셨다. 그러면서도 양반의 법도만을 중시하셨으니, 내 눈에는 마치 이솝우화 속 ‘개미와 베짱이’ 같았다.


여름이 되어 연보라색 가지꽃과 담 울타리의 노란 호박꽃이 지고 열매가 맺히면, 엄마는 가마솥에 밥을 할 때 가지를 함께 쪄내셨다. 찬물에 잠시 담갔다 쭉쭉 찢어 집간장과 참기름, 깨소금으로 조물조물 무쳐낸 가지나물, 그리고 들기름에 볶고 새우젓으로 간을 한 애호박은 여름 밥상의 단골 메뉴였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그 귀한 손맛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변화는 40여 년 전, 도시로 나와 중학교 자취생활을 시작하며 찾아왔다. 자취방 근처에 살던 친구 방에 놀러 갔다가 신기한 광경을 보았다. 옆방 아주머니가 연탄불 위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가지와 애호박에 밀가루와 달걀물을 입혀 노릇노릇하게 전을 부치고 계셨던 것이다.


시골에서는 접해보지 못한 식용유의 고소한 향과 전 요리는 너무나 생소하고도 특별했다. 나는 아주머니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등 뒤에서 요리 과정을 몰래 훔쳐보며, 어깨너머로 배운 그 낯선 맛에 마음을 빼앗겼다.


세월이 흘러 8년 전, 이스라엘 성지순례 길에서도 나는 가지와 호박을 만났다. 호텔에서 식사 도중 에어프라이어에 구워 수분이 적당히 빠진 그 요리에서 가지와 호박 본연의 깊은 맛을 느꼈을 때, 마치 타국에서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워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요즈음도 고향에 사는 언니와 동생 집에 가면 가지와 애호박 요리가 상에 올라온다.


한배에서 태어난 세 자매인데도 각자 출가한 집안의 가풍에 따라 요리법과 맛이 제각기 다른 것을 보면 참으로 신기하다. “사돈네 오이 먹는 방법도 다르다”는 옛말처럼, 우리는 각자의 삶에 맞는 맛을 만들어 가고 있는 모양이다.


가마솥 밥 위에서 쪄내어 엄마의 사랑 가득한 손길로 무쳐주셨던 그 가지나물과 애호박볶음. 어린 날에는 왜 그리도 무심했는지, 오늘따라 그 소박한 맛이 마냥 그리워진다. 이제 나의 인생도 어느덧 저물어가는 늦가을의 문턱에 서 있는 것만 같다.


그 옛날 가마솥 위의 가지처럼, 나의 삶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는 맛으로 익어가길 기도해 본다.


글 _  권명자 모니카(의정부교구 남양주 지금동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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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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