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종종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기도를 시작한다. 나는 자문하곤 한다. 하늘이 어디일까. 하느님이 구름 너머, 허공 어딘가에 있다는 뜻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하느님이 구름 너머 창공 어딘가에 있다면, 그 창공이 하느님을 감싸안는 더 위대한 존재라는 뜻이다. 하느님이 천지의 창조자라면서, 하느님을 천지의 어느 한 특정 장소에서 찾다니, 모순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다.
하느님이 어떤 장소에 있다면, 그 장소가 하느님을 포용하는 더 큰 세계가 된다. 하느님보다 더 큰 세계라니. 물론 허공 한쪽에 있는 신도 신일 것이다. 신이되, 인간이 상상한 신일 것이다. 인간의 상상 이전의 하느님, 상상의 근원이자 너머의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 인간의 좁은 생각에서 해방해야 한다. 신을 어떤 공간이나 장소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나 공간에서 신을 보는 역발상이 필요하다. 모든 것, 모든 곳에서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일갈했다. 일면 정당한 말이다. 니체가 죽인 신은 인간이 광활한 세계의 한구석에 숨겨 두었다가 아쉬울 때 자신의 온갖 욕망을 채워주는, 사실상 인간이 만든 편협한 신이기 때문이다.
신을 생각할 때 무의식중에 신의 주변이나 배경까지 따라오곤 하지만, 거기에 머물면 안 된다. 신을 둘러싼 그 주변과 배경에서도 신을 보아야 한다. 허공에서 빛나는 신을 발견해야 한다. 그렇게 주변을 중심으로 보는 깊은 묵상이 필요하다. 신이 없는 곳이 없는, ‘무소부재(無所不在)’는 그런 식으로 타당해진다.
우리 집에 열한 살 된 고양이 두 마리가 있다. 고양이들이랑 여러 해 살다 보니 뭘 찾는지, 기분이 어떤지 어지간히 교감이 된다. 고양이들도 집안 분위기를 적절히 파악한다. 가족이 밝게 다 모여있으면 얘들도 같이 모여 편안해하고, 무언가 진지하면 얘들도 움츠러든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동물이나 사물의 입장에서 세계를 보는 상상을 하곤 한다. 고양이 눈으로 보면, 인간이란 것들은 말도 못 알아듣는, 답답하고 희한한 존재일 것이다. 다른 눈으로 보니 인간만의 고유성이 아닌, 모든 존재의 평등성과 고유성이 느껴진다.
시편 148편을 다시 읽었다. 하늘, 천사, 해, 달, 별, 땅, 깊은 바다, 큰 물고기, 번개, 우박, 눈, 안개, 바람, 산, 언덕, 과일나무, 송백, 들짐승, 집짐승, 길짐승, 날짐승, 임금, 추장, 고관, 재판관, 처녀, 총각, 늙은이, 어린이…. 모든 것에게 하느님을 찬양하란다. 이 구절을 읽노라면 찬양으로 넘실대는 세상을 상상하게 된다. 예전에는 모두에게 찬양받는 하느님을 성경의 주인공으로 여겼다. 그런데 요사이는 그렇게 찬양하는 모든 존재, 인간과 비인간 존재 모두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향하는 귀한 존재라는 메시지가 더 다가온다.
인간, 동물, 하늘, 땅, 산, 바다, 벌레 모두 하느님 앞에 차별이 없다. 이들 모두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하느님을 향한다. 사람만 하느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자신의 존재 방식 그대로 하느님을 증명한다. 모두가 하느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20)라고도 한다. 삼라만상이 평화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고양이와 강아지, 새와 벌레, 물고기와 나무의 눈으로도 세상을 보아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오늘의 신앙과 신학을 다시 세워가야 한다. 노아의 방주 안에 있는 생물만이 아니라, 방주의 창밖에 있는 모든 비인간 존재와 함께 사는 훈련이 신앙의 근간이어야 한다.
글 _ 이찬수 박사(종교평화학자, 가톨릭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