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聖枝)를 흔드는 손끝이 경쾌하다. 그런데 우리는 안다. 이 환호 끝에 고통의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묻게 된다. 예수님은 왜 그 길을 피하지 않으셨을까? 그분의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그리고 문득, 더 가까운 물음이 밀려온다. 죽음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살다 보니 새로 맺는 인연보다 하늘나라로 가신 분들이 더 많아졌다. 내가 좋아하고 존경했던 분들이 이제 하늘나라에 더 많이 계신 듯하다. 사실 죽음은 나이와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가 마주하는 현실이기에 이 문제를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님의 「죽음 부활 영원한 생명 바로 알기」에서 실마리를 찾아본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의 죽음을 초월적인 영웅의 최후처럼 떠올린다. 그러나 로핑크 신부님은 짚는다. 예수님의 죽음은 철저한 ‘무력함’이었다고. 그분은 십자가에서 멋지게 탈출하는 슈퍼 히어로도, 고통을 한순간에 지워버리는 마법사도 아니셨다. 우리처럼, 아니 우리보다 더 처절하게 죽음 앞에 서셨다. 그 막다른 순간,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온전히 아버지께 내어 맡기셨다. 바로 이 ‘내맡김’을 통해 죽음이란 하느님 손안으로 뛰어드는 가장 깊은 신뢰의 행위임을 몸소 보여주셨다.
죽음은 칠흑 속으로 영영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책은 단호하게 말한다. 죽음의 진짜 이름은 ‘만남’이라고. 우리가 눈을 감는 그 순간, 어둠이 아니라 우리를 빚으시고 사랑하신 분의 얼굴과 마주한다. 오래 그리워하던 이를 마침내 껴안는 순간처럼, 죽음은 삶의 모든 조각이 하나로 맞춰지고 참된 내가 온전히 드러나는 가장 강렬한 만남이다. 그러니 죽음은 공포가 아니라, 어쩌면 가장 큰 설렘이다.
물론 마냥 설렐 수만은 없다. 그 순간 우리는 하느님이라는 거울 앞에 서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거울. 내가 저지른 잘못, 이기심, 사랑하지 못한 순간들이 적나라하게 비친다. 이것이 바로 ‘심판’이다. 그러나 판사가 의사봉을 내려치는 것 같은 법정 드라마가 아니다. 압도적인 사랑 앞에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 바로 그것이 심판이다. “나는 왜 더 사랑하지 못했을까?” 이 책은 그 뼈아픈 후회가 곧 ‘정화하는 불’이라고 말한다. 그건 벌이 아니라 치유다. 우리를 온전한 사랑의 사람으로 빚어내는 과정이다.
부활한 우리는 유령처럼 둥둥 떠다니게 될까? 아니다. 이 책은 우리가 ‘육신’과 함께 부활한다고 말한다. 내가 살며 겪은 기쁨과 슬픔, 사랑했던 사람들, 땀 흘려 일군 이야기들이 모두 함께 하느님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 나눈 사랑과 헌신, 아무도 몰라주는 작은 노력 하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모두 부활의 재료가 되어 영원히 빛난다.
또 하나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하느님의 시간에는 우리가 아는 시곗바늘이 없다.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우리는 시간의 틀을 벗어나 ‘영원한 현재’로 들어간다. 그 순간이 곧 종말이고, 재림이며, 부활이다. 차가운 무덤에서 지루하게 순서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동시에 하느님의 영원한 축제로 초대받는 것이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예수님은 죽음을 향해 걸어가셨다. 그러나 그 걸음은 부활을 향한 행진이었다. 우리도 언젠가 그 길을 걷는다. 로핑크 신부님의 이 책은 그 길이 결코 외롭거나 허무하지 않다고 일깨워준다. 우리의 죽음은 하느님 품으로 뛰어드는 가장 안전한 귀향이다. 지금 여기서 서로 사랑하고, 정의롭게 살고, 작은 선행을 베푸는 순간마다 우리는 영원을 짓고 있다. 죽음은 그 모든 것이 완성되는 문이다. 예수님이 먼저 가셨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흔들리는 성지 사이로 십자가 너머 부활의 빛을 바라보자. 그 만남을 향해 걸어가는 성주간이 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