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14세 교황이 11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평화 회복을 위한 밤 기도를 주례하며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다. OSV
전쟁 중단 촉구와 평화 메시지를 전해온 레오 14세 교황을 향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2일 “교황은 범죄 문제에 나약하고 외교 정책에서도 형편없다”며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다. 지구촌 전쟁을 이끌고 있는 국가 지도자가 교황을 향해 직접 막말을 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은 교황이 평화를 촉구하는 기도회 직후 나왔다. 앞서 교황은 11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평화를 위한 밤 기도를 주례하며 온·오프라인으로 참여한 수만 명의 신자와 함께 전쟁 종식과 세계 평화 회복을 위해 묵주기도를 바쳤다. 교황은 교황청 추기경단을 비롯해 대성전에 모인 이들과 ‘영광의 신비’를 묵상하며 약 90분간 묵주기도 5단을 바쳤다.
아프리카·아메리카·아시아·유럽·오세아니아의 전통 의상을 입은 대륙별 신자 대표들은 차례대로 각 단의 시작 때마다 나와 대성전 제대 앞에 모셔진 성모상 초에 불에 붙였다. 이날 밝혀진 촛불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 무덤에 있는 ‘평화의 등불’을 가져온 것이다. 성인이 전한 평화의 정신이 세계로 퍼져나가길 바라는 지향이었다. 교황과 신자들은 묵주 한 알씩 기도할 때마다 간절한 평화를 염원했다.
교황은 기도회 강론에서 “인류 가족 안의 조화와 균형이 심각하게 무너졌다”며 “전쟁을 멈추고 생명을 섬겨야 한다”고 촉구했다. 교황은 현 상황이 “생명의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마저 죽음의 논리에 악용되고 있다”며 “한 아버지를 둔 형제자매의 세계는 사라지고 적대만 가득한 현실이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교황은 이어 “기도는 우리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피난처도, 수많은 불의가 낳은 고통을 무디게 하는 마취제도 아니다”라며 “기도는 오히려 죽음에 맞서는 가장 이타적이고 보편적이며 변화를 일으키는 응답”이라고 말했다. 이어 “기도를 통해 만나는 하느님 나라에는 칼도, 드론도, 복수도, 악의 경시도, 부당한 이익도 없으며, 오직 존엄과 이해, 용서만이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교황은 모든 이가 “평화의 일꾼”이 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각국 지도자들에게는 “전쟁을 멈추고 평화의 시간으로 나아가, 대화와 중재의 식탁에 앉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교황은 “전 세계 모든 사람은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전쟁을 거부해야 하며, 기도를 통해 마음과 생각에 남은 모든 폭력을 내려놓아야 한다”며 “사랑과 절제, 그리고 선한 정치의 힘 위에 세워진 ‘평화의 모자이크’ 안에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교황은 “자기 자신과 돈을 우상처럼 숭배하는 것을 멈추고, 권력을 과시하는 행위를 중단해야 하며 전쟁은 이제 그만둬야 한다”며 미 행정부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튿날인 12일 SNS에 “레오 14세 교황은 교황으로서 정신을 차리고 상식을 발휘하여 급진 좌파에 영합하는 것을 멈추고 정치인이 아닌 위대한 교황이 되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장문의 비난 글을 게재했다.
교황은 13일 아프리카 4개국 사목 순방을 위해 알제리로 향하는 기내 기자회견에서 “저는 정치인이 아니며, 계속해서 전쟁에 맞서 평화를 증진하고 대화를 촉진하는 목소리를 낼 것”이라며 “트럼프 행정부에 복음의 메시지를 분명히 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이 제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이며,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