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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칼럼] 추기경과 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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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하루 전, 제자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한 일을 하셨다.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었다. 권력의 뒤바뀜이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그분은 이렇게 물으셨다. 아시아에 사는 우리는 어쩌면 이해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누군가의 발, 혹은 샌들을 만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에서 훗날 추기경이 된 대주교가 몸을 굽혀 불교 최고 승려의 잃어버린 샌들을 집어 든 일이 있었다. 그는 고(故) 안토니 소터 페르난데스 추기경(1932~2020)이었다. 어느 날 밤, 쿠알라룸푸르의 불교 사원에서 열린 종교 간 모임이 끝난 뒤였다. 어둑한 마당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신발을 신는 가운데,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최고 승려였던 고(故) 담마난다 나야카 마하 테라는 자신의 샌들을 찾고 있었다. 당시 쿠알라룸푸르대교구장이었던 소터가 먼저 그 승려의 샌들을 발견했다. 소터는 조용히 샌들을 집어 들고 승려의 발 앞에 놓은 뒤, 겸손히 물러섰다.


승려는 놀라며 말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당신은 쿠알라룸푸르의 대주교인데, 내 샌들을 만지셨습니다. 그 의미를 아십니까?” 소터는 특유의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저는 그저 쿠알라룸푸르의 대주교일 뿐입니다. 당신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최고 승려이시고요.” 두 사람은 웃었고, 서로를 껴안았다.


그러나 그 순간의 이면에는 성목요일이 더욱 분명히 드러내는 진실이 담겨 있다. 아시아 문화에서 타인의 샌들을 만진다는 것은 사소한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자세다.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선언이다. 복음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된다. 직함이 아니라, 무릎을 꿇는 데에서.


성직주의는 거리 위에서 자란다.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 직무와 일상 사이, 직함과 따뜻함 사이의 거리에서 말이다. 서품이 자신을 높이는 것이라 믿는 것은 미묘한 유혹이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자신을 낮추라는 부르심이다. 최후의 만찬 밤, 그리스도께서는 물과 수건, 그리고 인간의 발로 그 환상을 무너뜨리셨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직주의가 사목활동을 왜곡한다고 거듭 경고했다. 성직주의는 사목자를 기능인으로, 사제를 행정가로 만들고, 권위를 특권과 혼동하게 만든다. 소터는 문서나 교령이 아니라 한 켤레의 샌들로 성직주의를 무너뜨렸다.


그는 2016년 추기경에 서임된 뒤에도 국가 훈장인 ‘다툭’, ‘탄 스리’ 등의 칭호를 거부했다. “그냥 소터라고 부르세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것은 꾸밈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학이었다. 피정이나 세미나에서 신자들은 그가 식사 후 조용히 접시와 컵을 스스로 씻던 모습을 기억한다. 알림도 없고, 연출도 없었다. 그저 비눗물 속에 담긴 그의 두 손뿐이었다.


2006년 치앙마이에서 열린 제1차 아시아 선교대회에서, 여러 추기경과 주교들이 함께한 자리에서 소터는 매우 직설적으로 설교했다. 그는 성목요일 복음의 말씀을 되새기며 말했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가운데서 더 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는 먼저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이어 일부 교회 지도자들의 등을 서늘하게 했을지도 모를 말을 덧붙였다. “복음에 나오는 대사제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당시 율법으로 백성을 억압하던 교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인 우리가 바로 그 대사제들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없었다. 오직 분명함만 있었다. “대사제인 우리의 소명은 섬기는 것이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발을 씻는 것에 대해 설교하는 것과 이웃의 발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다른 일이다.


성직주의의 반대는 약한 리더십이 아니다. 무릎 꿇는 리더십이다. 붉은 모자는 피를 흘릴 준비를 상징한다. 그러나 추기경 소터는 더 즉각적인 진리를 알고 있었던 듯하다. 피를 흘리기 전에, 먼저 몸을 낮추어 발을 씻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혹은 아시아 현실에서라면 다른 이의 샌들을 만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아시아 교회 앞에 놓인 질문은 더 이상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의 질문이다. 누가 무릎을 꿇겠는가? 직무 사제직, 섬기는 사제, 붉은 모자가 그의 머리에 씌워졌다. 영광의 표지이자, 순교의 표지였다. 그러나 소터가 가장 그리스도를 닮았던 순간은 몸을 낮출 때였다. 식탁에서 일어나 수건을 들고, 참된 지도력은 높아짐이 아니라 섬김에 있음을 보여주신 주님처럼.


성목요일, 그리스도께서는 직무 사제직을 제정하셨다. 최후의 만찬에서 첫 성체를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며,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고 말씀하셨다. 사도들에게 단순한 의식을 넘어 거룩한 정체성을 맡기셨다. 섬기고, 돌보며, 생명을 내어놓는, 자신을 낮추는 삶 말이다.



글 _ 조셉 마실라마니
말레이시아 보르네오에서 활동하는 가톨릭 언론인이다. 40여 년 넘게 다양한 언론사에서 일하며 사회와 경제, 정치를 비롯해 종교 분야에 관한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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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6-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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