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꿈CUM] 바오로 사도의 발자취를 따라서 _ 튀르키예, 그리스 성지 순례기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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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린토 운하. 로마 제국 네로 황제가 약 700m 구간을 10~30m 깊이로 파서 운하 건설을 시작했는데, 네로 황제가 죽은 후 공사가 중단되었다. 이후 2000년 가까이 운하 완공을 위해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기술의 한계로 실패했다. 현재의 코린토 운하는 다이너마이트의 발명 덕분에 1893년 7월 완공됐다.
창조주는 아브라함에게 의인(義人) 10명만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소돔과 고모라에는 유황과 불이 퍼부어졌다.(창세 18,16-19,29 참조) 의인 10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코린토의 오늘은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이다. 의인 10명이 없었던 것일까. ‘아크로 코린토’(Acro Korinthos), 산 위의 코린토 성채는 유황과 불을 맞은 듯 헝클어져 있었다. 폐허였다. 성벽은 허물어져 있었고, 부서진 신전의 파편들이 이곳저곳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영광과 번영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항구도시 코린토는 소위 잘 나가던 도시였다. 항구는 늘 배로 북적였고, 도시는 배에서 내리고 오르는 선원과 물자로 가득했다. 그런 코린토에 위기가 찾아온다.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후 세력을 확장하던 로마의 공격용 레이더에 코린토가 딱 걸린 것이다. 교통, 물류의 중심지였던 코린토는 로마가 그리스 및 지중해패권을 장악하기 위해선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로마는 코린토에 선전포고를 한다. 코린토는 굴복하지 않았다. 저항을 선택한다. 이에 로마는 코린토를 무력으로 제압하기로 한다. 코린토 성 공략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코린토 성은 벼랑 위의 천연요새다. 성벽은 한 겹이 아니라 이중 삼중이었고, 곳곳에 망대와 육중한 벽돌로 지어진 성채가 있었다.
격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국 로마군의 끈질긴 공격에 성벽 한 귀퉁이가 무너졌다. 군인들이 성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시가전이 벌어졌다. 로마군은 그리스인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살해했다. 마치 그동안 포위 공격으로 인한 고초를 분풀이 하려는 듯했다. 미의 여신을 섬겼던 화려한 아프로디테 신전이 불탔다. 신전에서 일하던 여사제들도 몰살됐다. 성 안은 지옥으로 변했다. 찬란한 문화를 자랑했던 코린토는 순식간에 유령의 도시로 변했다. 예수가 탄생하기 불과 150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코린토가 다시 재건된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 로마 카이사르 황제에 의해서다. 이후 네로 황제가 노예 1만여 명을 투입, 코린토 운하 건설을 시작했다. 아프로디테 신전을 비롯해 10여 개의 크고 작은 신전들을 재건축하는 등 건설 경기 붐도 일었다.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건축물을 비유로 들어 신앙에 대해 설명하는 것도, 당시 코린토의 엄청난 건설 경기 붐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1코린 3,10-11 참조) 이같은 코린토 경제 부양책은 인구 유입을 가속화시켰다. 코린토에 가면 먹고 살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너도나도 코린토로 몰려들었다.
폐허로 변한 아프로디테 신전
예수 사후(死後), 바오로가 코린토를 찾았을 당시 코린토 상주 인구는 약 25만명, 이에 딸린 노예는 약 40만명에 달했다. 여기에 항구를 드나드는 선원 등 유동 인구를 포함할 경우 코린토 인구는 총 80만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우리나라 경기도 성남시 혹은 충청북도 청주시 인구 규모다.
다가 이 많은 사람의 주머니는 얇지 않았다. 두둑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주머니가 두둑하고, 따분한 일상이 반복되면 딴짓을 하기 마련이다. 코린토인들은 그 무료함을 향락과 쾌락으로 메웠다. 코린토 본토인은 물론이고 코린토 찾은 선원 및 이방인은 항구에서 내려 걸어서 반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는 코린토 성을 찾았다. 그곳에 가면 아프로디테 신전의 무녀(巫女)들과 쾌락의 밤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육중한 코린토 성문을 지나 작은 언덕을 올라가면 아프로디테(비너스) 신전 터가 나온다. 신전 기둥들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창녀 역할을 했던 수백 명의 무녀가 생활했던 곳이다. 지금도 코린토 박물관에 가면 남성의 성기를 조각한 유물을 만날 수 있다. 당시에는 환자가 완치를 희망하는 신체 부위를 조각해서 신전에 봉헌했는데, 그만큼 문란한 성생활로 인한 관련 질병이 만연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쾌락의 도시에서 바오로는 1년 6개월 동안 머물며 하느님 말씀을 가르쳤다.(사도 18,11 참조) 그런데 쾌락과 환락의 도시, 아프로디테의 도시에서 바오로가 선포한 것은 사랑이었다. 역설적이지 않은가!
바오로 사도는 사랑의 도시에서 사랑을 선포했다. 그런데 바오로가 말하는 사랑은 코린토인들이 알고 있던 그런 사랑이 아니었다. 바오로는 성적 쾌락에 매몰되어 허무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던 코린토인들에게 영적인 사랑을 이야기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1코린 13,4-8)
바오로 사도가 참사랑을 선포했던 장소를 찾아가기로 했다. 코린토 성에서 나와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인들에게 설교했던 현장까지 가는 데는 차로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다가 이 많은 사람의 주머니는 얇지 않았다. 두둑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주머니가 두둑하고, 따분한 일상이 반복되면 딴짓을 하기 마련이다. 코린토인들은 그 무료함을 향락과 쾌락으로 메웠다. 코린토 본토인은 물론이고 코린토 찾은 선원 및 이방인은 항구에서 내려 걸어서 반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는 코린토 성을 찾았다. 그곳에 가면 아프로디테 신전의 무녀(巫女)들과 쾌락의 밤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육중한 코린토 성문을 지나 작은 언덕을 올라가면 아프로디테(비너스) 신전 터가 나온다. 신전 기둥들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창녀 역할을 했던 수백 명의 무녀가 생활했던 곳이다. 지금도 코린토 박물관에 가면 남성의 성기를 조각한 유물을 만날 수 있다. 당시에는 환자가 완치를 희망하는 신체 부위를 조각해서 신전에 봉헌했는데, 그만큼 문란한 성생활로 인한 관련 질병이 만연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쾌락의 도시에서 바오로는 1년 6개월 동안 머물며 하느님 말씀을 가르쳤다.(사도 18,11 참조) 그런데 쾌락과 환락의 도시, 아프로디테의 도시에서 바오로가 선포한 것은 사랑이었다. 역설적이지 않은가!
바오로 사도는 사랑의 도시에서 사랑을 선포했다. 그런데 바오로가 말하는 사랑은 코린토인들이 알고 있던 그런 사랑이 아니었다. 바오로는 성적 쾌락에 매몰되어 허무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던 코린토인들에게 영적인 사랑을 이야기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1코린
13,4-8)
바오로 사도가 참사랑을 선포했던 장소를 찾아가기로 했다. 코린토 성에서 나와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인들에게 설교했던 현장까지 가는 데는 차로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