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꿈CUM] 바오로 사도의 발자취를 따라서 _ 튀르키예, 그리스 성지 순례기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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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세기에 건립된 코린토 유적지의 아폴론 신전. 바오로도 이 신전 옆을 걸어 지나갔을 것이다.
바오로가 재판받았던 코린토 유적지의 비마(Bema, 연단)
“유다인들이 합심하여 들고 일어나 바오로를 재판정으로 끌고 갔다.”(사도 18,12)
1년 6개월 넘게 코린토에 머물며 복음을 선포하던 바오로가 하루아침에 피고발자 신세가 되어 재판정으로 끌려갔다.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유대인들이 바오로를 고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코린토 총독은 철저히 중립을 지킨다. 유대인들의 고발장을 접수한 후, 간단한 조사만 마치고 바오로를 방면한다. 바오로가 살인이나 방화, 간통 등 강력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고, 치안을 해치는 중대한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고발 사건은 바오로가 코린토를 터나 에페소와 안티오키아로 돌아가는 계기가 된다.
바오로가 공개적으로 조사받았던 자리가 지금도 남아있다.
코린토 성에서 내려와 찾은 코린토 유적지. 사람 사는 모습은 시대를 초월해 모두 비슷했다. 종교 시설 및 목욕탕, 공중 화장실, 상점, 관공서, 술집 터 등이 촘촘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코린토 유적지 광장 중심부에 ‘비마’(Bema)가 있다. 비마는 ‘연단’이라는 뜻으로, 총독이나 지방 자치 단체 관리가 연설하던 곳이다. 원전 희랍어 성경은 이곳을 ‘베마’(βημα)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우리말 성경은 이 단어를 ‘재판정’ 으로 번역했다. 바오로는 이곳에 끌려와 총독으로부터 심문을 받았다.
그렇다면 바오로 사도가 1년 6개월 동안 쾌락의 도시에 머물며 선포하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모함과 시기, 질투, 고발, 환난을 각오하고 반드시 말하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더 나아가 당시 코린토에 살던 그리스도교인들은 어떤 문제에 직면했으며, 어떻게 신앙을 이어나갔을까. 그 내용을 톰 홀랜드(Thomas Holland)가 저서 「도미니언 : 기독교는 어떻게 서양의 세계관을 지배하게 되었는가」에서 잘 정리하고 있다. 이곳에 그 내용을 옮겨본다.
“그리스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코린토스는 용광로 같은 도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해방된 로마 자유민들의 후손이 흘러들어와 그리스인 부자들과 뒤섞였다. 선박왕들이 구두 수선공과 섞여서 살았고, 순회 철학자들이 유대인 학자들과 교류했다. 이런 도시이니만큼 사람들의 정체성은 별로 뿌리 깊지 않았다. 과거 알렉산드로스 시대에, 저명한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이 도시에서 커다란 통 속에서 살았고 또 사람들이 보는 데서 자위행위를 함으로써 그 사회의 규범에 대한 경멸을 악명 높게 선언했다.
그러나 바오로는 코린토스 사람들에게 그들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를 전면적으로 재조정해야 한다는, 아주 강력한 요구를 하고 나섰다. 부를 자랑하는 도시에서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비천한 자와 가난한 자, 즉 아무것도 아닌 자를 선택했다고 과감하게 선언했다. 최고가 되기 위한 경쟁이 우선인 사람들 사이에서, 하느님이 현자를 부끄럽게 하기 위해 어리석은 자를 선택했고, 강자에게 수치심을 안기기 위해 약자를 선택했다고 선언했다. 노예와 주인의 위계질서를 당연시하는 세계에서, 그리스도 자신이 노예의 죽음을 당하신 마당에 노예와 자유인을 구분하는 것은 그리스인과 유대인을 구분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바오로는 이 메시지를 끊임없이 설교했지만, 딜레마(서로 다른 습속의 조화)로 고심했다. 그는 세상을 널리 여행했으므로 서로 다른 민족의 습속이 다양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처럼, 바오로의 코린토 선교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코린토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 아니다. 자연 안에서 유유자적하며 하느님의 섭리를 찬미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를 가진 전원도시가 아니다. 돈과 명예, 쾌락을 위해 질주하는 인간 군상이 모인 곳이다. 그래서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바오로의 편지는 오늘날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집 우편함에 도착한 편지이기도 하다.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바오로의 편지를 보면, 당시 코린토의 가장 큰 문제는 분열이었다. 코린토 신자들은 자신이 각자 추종하는 사도와 설교자들을 중심으로 파벌을 형성하고 있었다. 여러 파벌로 쪼개진 코린토 교회를 바라보는 바오로 사도의 심정은 참담했을 것이다. 게다가 서로 뜻이 맞지 않아 신자들 사이에 다툼도 잦았다. 고소 고발이 난무했다. 불륜으로 인한 혼인의 정체성 문제, 우상, 교리해석 문제도 심각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호소한다.
“모두 합심하여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이 일어나지 않게 하십시오. 오히려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하나가 되십시오.”(1코린 1,10)
“여러분이 서로 고소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그릇된 일입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왜 차라리 그냥 속아 주지 않습니까?”(1코린 6,7)
바오로 사도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저지르는 타인에 대한 단죄’를 경고한다. 타인을 죄인이라고 함부로 단죄하지 말라는 것이다. 중대한 범죄를 저질러도, 윤리적으로 몹쓸 짓을 했어도, 하느님은 그 죄인을 감싸신다.
“그리스도께서는(여러분이 죄를 지었다고 단죄하는) 그 형제를 위해서도 돌아가셨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형제들에게 죄를 짓고 약한 그들의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1코린 8,11-12)
성경에 나타나는 코린토인들의 모습에서 나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읽혀지는 것은, 아마도 코린토가 현대사회의 결핍과 모순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코린토로의 여행은 현대사회라는 광장에 외롭게 서 있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이런저런 자잘한 심적 고통들을 안고, 코린토 유적지들을 둘러 보았다. 바오로 사도가 조사받았던 비마(연단, 재판정)가 눈에 들어왔다. 연단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 보았다. 2000년 전 고발되어 끌려온 바오로 사도의 긴장한 모습, 그리고 무슨 일이 생겼냐며 웅성거리며 모여드는 군중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이유 없는 고난 앞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머리를 숙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연단 위에 있는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바오로의 눈에선 확신이 담겨 있었다.
순간, 바오로가 나에게 보낸 편지가 집 우편함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미 반송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 편지를 뜯어봐야겠다.
어수선한 마음으로 연단을 내려오려는데, 오른편에 바오로의 말이 희랍어로 새겨진 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삶이 힘들어 지쳐있었을 때 이 편지를 읽었다면 큰 힘이 되었을 텐데…. 내가 아직 뜯지 않아 먼지 뽀얗게 쌓인 그 편지의 말씀, 코린토인들에게 보내는 둘째 편지 4장 17절이었다.
“το γαρ παραυτικα ελαφρον της θλιψεως καθ υπερβολην εις υπερβολην αιωνιον βαρος δοξης κατεργαζεται ημιν.”(2코린 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