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교구·풍산홍씨 대종회, 농은 선생 탄생 300주년 심포지엄 주최
성 김대건 신부가 ‘한국 가톨릭교회 첫 수덕자’ 농은 홍유한(1726~1785) 선생을 초기 교회의 길을 닦은 ‘구약의 선지자’로 여겼다는 분석이 나왔다. 나아가 홍유한이 한국 교회 창설(1784) 이전 ‘믿을 교리’ 서적만 유입된 한계 속에도 스스로 ‘행할 교리’의 기초를 실천한, 진정한 신앙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홍유한 선생 탄생 300주년을 기념해 5월 30일 경북 영주 영주시민회관에서 안동교구와 풍산홍씨 대종회 주최로 마련된 학술 심포지엄에서다.
성호 이익의 제자로 「천주실의」와 「칠극」 등 한역 서학서를 접한 홍유한은 일찍이 과거를 단념, 1760년 한양에서 충청도 예산으로 간 데 이어 1775년 경상도 순흥(영주)으로 옮겨 교리서에 따른 수계생활로 삶을 마무리했다. 현재 안동교구 우곡성지에는 홍유한의 묘와 함께 그의 후손인 풍산홍씨 순교자 13위의 가묘가 조성돼 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조한건 신부는 심포지엄에서 “라틴어를 잘 아는 김대건 신부가 서한집에서 굳이 홍유한을 ‘홍요한(Hong Iohan)’이라고 표기한 것은 이벽(요한 세례자)과 함께 그를 한국 교회 시작의 길을 닦아놓은 선구자로 강조하기 위한 신학적 기획”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면서 “‘자연적 사물의 이치’로 창조주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다는 것은 조선의 유학자로서 천주교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음을 말한다”며 “김대건 신부의 구상 속에 홍요한(홍유한)이 자연적 이성으로 창조주의 존재를 확증한 구약의 선지자라면, 이벽은 그 빛을 받아 실제로 천주교 신앙 공동체를 세우고 세례 실천 공동체를 만든 신약의 한국 교회 설립자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조 신부는 또 “화세(火洗)를 받았다는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 외에 홍유한이 직접 천주교 신앙을 통해 수계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재종질(육촌형제의 아들)이자 제자인 복자 홍낙민(루카) 등이 남긴 제문(祭文)에 나타나는 그의 삶은 단순히 유교적 덕행의 삶보다 더 적극적인 형태인 그리스도교적 애덕과 겸손을 보여준다”며 “이후 풍산홍씨 가문에서 생겨난 홍낙민 등 13위 순교자들의 뿌리에는 홍유한과 같은 선조가 있다”고 강조했다.
해당 발표 토론을 맡은 원재연(하상 바오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박사는 “홍유한의 수덕생활은 일반적인 유학자와 다르다. 천진암 강학(1779)에서도 드러나지 않는 안식일 지킴과 재계 생활·희생적 나눔의 삶 등 천주교 가르침에 입각한 덕행이 드러난다”며 “그가 한국 교회의 본격적 시작을 알리기 위한 행할 교리의 기초를 놓은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였다고 자리매김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안동교회사연구소 소장 신대원 신부도 홍유한을 한국 신앙 공동체 탄생의 마중물 역할을 한 ‘요한 세례자’와 같은 인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 신부는 홍유한의 순흥 이주를 두고 애초 목표였던 ‘학문 공동체’ 구상을 전면 수정한, 서학서에서 깨달은 진리를 실천하는 ‘수덕 공동체’ 건설을 위한 결행이라고 봤다. 그리고 이 같은 삶의 형태가 1776년 그를 방문한 권철신(암브로시오) 등에게 영향을 줘 마침내 한국 교회 창립으로 이어졌다고 풀이했다.
내포교회사연구소 소장 김성태 신부는 홍낙민 복자가 스승 홍유한의 가르침을 통해 형성된 사상적 기반으로 신앙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초기 교회 핵심 지도자로 활약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를 통해 홍유한으로부터 이어진 풍산홍씨 가문의 공동체적 신앙 유산이 훌륭한 열매를 맺었다고 역설했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