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묘 방문한 부이용 신부
최 신부 친척에 의한 관리 추정
2년 후 드브레드 신부 배론 찾아
르메르(Le Merre) 신부가 1890년대 초중반 무렵 충북 제천 배론(현 봉양읍 구학리)의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1821~1861) 묘소를 참배한 이후로도, 파리외방전교회의 후배 선교사들의 ‘한국인 두 번째 사제’의 안식처 방문은 이어졌다.
부이용(Bouillon, 한국명 임가미, 1869~1947) 신부는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에게 보낸 1900년 6월 25일자 편지에 배론 성 요셉 신학교 터와 그 뒷산에 있는 최 신부 묘소를 방문했다고 보고했다. 당시 그는 장호원본당(현 청주교구 감곡본당) 초대 주임을 지내고 있었다.
부이용 신부는 편지에서 “지금은 낡은 오막살이 집 한 채를 제외하고는 그 자리(신학교 터)에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이 집이 신학생들의 공부방이자 교장 푸르티에 신부의 거처로 쓰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집은 당시 성당 구실까지 했는데, 이름만 성당이었지 지붕 높이가 1.5m도 채 안 됐다”면서 “교우들 말에 따르면 당시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가 이 지방 출신인 최(양업) 도마 신부의 장례미사를 올린 것도 바로 그곳이라고 한다”고 적었다.
또 “베르뇌 주교는 키가 상당히 큰 분이었다는데, 제가 들어가 서 있을 수도 없을 만큼 천장이 낮은 걸 보면 그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거나 천장이 내려앉았거나 두 가지 중 하나가 맞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성 베르뇌(1814~1866) 주교의 유해는 1899년 왜고개에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될 때 신장이 174㎝로 측정됐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성인 남성 평균 키가 164㎝ 안팎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베르뇌 주교는 장신이었다.
아울러 부이용 신부는 “베르뇌 주교에게 큰 사랑을 받던 최양업 신부의 무덤이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바로 신학교 뒤편에 있는 산 속”이라며 “참배하러 가서 보니 무덤이 잘 가꿔져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마 상당수에 달하는 최 신부 친척들의 정성 때문인 것 같았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130리 떨어진 마을에 함께 살고 있었다”고 전했다.
르메르 신부가 참배했을 때 최 신부 묘는 ‘이름 모를 여인이 해마다 한 번씩 봉분을 벌초하다가 불과 몇 해 전부터 보살핌 없이 방치된’ 모습이었다. 반면 부이용 신부가 찾은 1900년에는 최 신부의 친척들로 추정되는 이들의 정성으로 잘 관리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드브레드 주교.
2년 뒤인 1902년 가을, 병인박해 이후 처음 배론에 공소가 다시 문을 열었다. 그러나 과거 300명 신자가 50여 채 집에 나눠 살았던 배론은 신자 집 10가구에 불과했다.
훗날 조선대목구 부대목구장 주교가 되는 드브레드(Devred, 한국명 유세준, 1877~1926)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보낸 1902년 12월 22일 자 편지에 배론에 다녀온 내용을 실었다. 당시 그는 제천까지 관할하던 원주본당(현 원주교구 원동주교좌본당) 주임이었다.
드브레드 신부는 “병인박해 이전 신학교로 쓰이던 옛집도 아직 건재한데 한 신자가 이곳에 기거하고 있다”며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최 신부의 묘가 있는데, 위치가 아주 좋고 신자들이 잘 복원해 놓았다”고 썼다. 최 신부 묘소가 1900년 부이용 신부가 확인한 뒤에도 신자들의 손길로 잘 관리되고 있었으며, 신학교 터 주인도 비신자에서 신자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드브레드 신부는 1906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교수로 전임한 뒤 교장 기낭(Guinand) 신부에게도 최 신부 묘를 찾은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1902년 신자들이 몰수당했던 땅을 되찾을 수 있게 됐을 때, 그곳으로 돌아온 구교우들이 옛 마을의 흔적을 내게 보여줬다”고 했고, 기낭 신부는 이 내용을 「가톨릭 선교」(Les Missions Catholiques) 제42권(1910년)에 기고했다. 이 잡지는 프랑스 리옹에 본부를 둔 전교회(현 교황청 전교회)가 발행한 주간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