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리트 히긴스 연구소’ 김점석(스테파노) 대표가 6월 26일 서울 종로구에서 마거리트 히긴스 사진 등을 들어 보이고 있다.
마거리트 히긴스가 1950년 6월 29일 수원비행장에서 더글러스 맥아더 최고사령관과 처음 만난 순간.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게 한, 인천상륙작전 관련 기사 복사본. 김점석 대표 제공
1950년 한국전쟁 인천상륙작전을 유일한 여성 종군기자로 취재했던 마거리트 히긴스의 생전 모습. 김점석 대표 제공
히긴스 자료 200여 점 수집… 특별전 계기 연구소 설립
“언론인에게 자료는 역사 실체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
“과거 전쟁의 고통을 다음 세대에 교육하는 건 우리 책임”
“한국은 세계의 잠을 깨웠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후 이틀 만에 서울로 들어온 여성 종군기자 마거리트 히긴스(1920~1966)는 저서 「War in Korea」(1951)에서 한국전쟁을 잠들어 있던 냉전을 깨운 ‘자명종’에 비유했다. 히긴스는 전쟁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과 동행하며 ‘인천상륙작전’ 현장을 취재해 한국전쟁 참상을 특종 보도한 유일한 여성 종군기자로 기록된 인물이다. 미국 출신인 그는 한국전쟁 보도로 1951년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6·25전쟁 76주년과 히긴스 서거 60주년을 맞아 ‘마거리트 히긴스 연구소’ 김점석(스테파노) 대표를 만나 한국전쟁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평화의 과제를 들어봤다.
30여 년간 취재 현장을 누빈 기자 출신인 김 대표는 현재 KTV 국민방송 국민리포트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며 수십 년째 국내외 고서점과 경매장을 찾아 근현대사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그의 손때 묻은 1만여 점의 소장품 가운데엔 전쟁 관련 출판 보도물뿐만 아니라, ‘1964년 국내에 처음 출시된 비틀즈 레코드’ ‘김삿갓 시집 초본’ ‘1988년 평화신문 창간호’ 등 우리 역사를 볼 수 있는 다양한 자료가 있다. 히긴스 관련 자료만 200여 점에 이른다.
김 대표는 “흔히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하지만, 근거가 없으면 실체가 있었어도 모르거나 없는 일 취급을 받는다”며 “언론인에게 자료는 역사의 실체를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라고 말했다.
자신을 ‘히긴스를 짝사랑하는 남자’라고 소개한 그는 기자 초년생 시절 우연히 히긴스를 알게 됐다. 세간은 히긴스를 ‘미모의 여기자’ 등으로 기억했지만, 김 대표가 주목한 것은 외모가 아닌 ‘언론인으로서의 사명’, 곧 기자정신이었다. 그는 “히긴스는 참호에서 잠을 자고, 풀밭에서 용변을 보며 벼룩과 함께 생활하는 등 장병들과 고락을 함께했다”며 “부상병들에게 수혈할 혈액이 부족하면 직접 헌혈했고, 전사자를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저마다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기록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이것이야말로 언론의 역할”이라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기록하는 것은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남기는 일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불꽃 같은 삶, 마거리트 히긴스 특별전’은 히긴스를 다시 알리는 계기가 됐다. 김 대표는 “‘그동안 이런 사람이 있는 줄 몰랐다’는 관람객들의 반응을 보며 히긴스를 더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며 연구소 설립 배경을 밝혔다.
김 대표는 히긴스를 한마디로 ‘그리운 언론인’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오늘날 언론은 사실보다 진영 논리에 휘둘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가짜뉴스로 갈등을 키우기보다 사실에 입각해 진실을 기록하는 것이 언론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고 말했다.
히긴스 역시 「War in Korea」에서 “우리는 재앙을 있는 그대로 보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느꼈다. (중략) 전투를 치르는 병사들이 고향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지 간절히 알리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적었다.
김 대표는 한국전쟁의 기억을 간직한 흔적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피란길에 오른 여인들’ ‘끊어진 한강다리’ ‘함락되는 서울을 탈출하며 히긴스가 탔던 한강의 나룻배’ ‘취재 도중 목숨을 잃은 국내외 종군기자 18명’ 등이다.
그는 “우리는 아직 종전이 아닌 휴전 상태”라며 “언젠가 남북이 화해할 날을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했다. 그날까지 평화를 이루기 위한 정신적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죄 없는 민간인들”이라며 “과거 전쟁을 교훈 삼아 그 고통을 다음 세대에 제대로 교육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책임”이라고도 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 시기 서울대교구 아현동본당에서 세례를 받은 그는 “과거 가톨릭교회가 핍박받는 이들의 피난처가 됐듯이 오늘도 메말라가는 정의와 평화를 위해 십자가의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고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