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가 순교한 장소, 세 분수의 바오로 성당(San Paolo alle Tre Fontane)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며 돌아다닌 로마 국적의 50대 유대인 바오로가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것은 서기 57년 경이다. 왜 체포되었을까. 기록상으로는 정확한 죄명이 남아있지 않지만, 성경에 따르면 아마도 내란을 모의하고 유대교 회당을 더럽힌 혐의를 받고 있었던 듯하다.(사도 24,5-6 참조) 특히 유대교 회당을 더럽힌 죄목이 가장 컸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이방인 에페소 사람 ‘트로피모스’ (τροφιμος)라는 인물과 관련 있다. 트로피모스는 바오로가 3차 전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동행한 인물이다.(사도 20,4 참조) 그는 바오로와 함께 예루살렘에 와서 예루살렘 성안에 머물렀다. 이를 본 유다인들은 바오로가 이방인인 트로피모스를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성전을 더럽했다고 여겨 그를 고발했다.(사도 21,27-31 참조)
성전 모욕죄는 만만하게 볼 죄가 아니다. 예수도 같은 죄목으로 십자가 사형선고를 받았다. 만약 기소 내용이 소명되지 않는다면, 바오로도 판례에 따라 예수와 같은 십자가 형을 받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바오로는 예수와 다른 점이 있었다. 그는 로마 시민이었다. 십자형은 노예 혹은 야만족들에게만 내려지던 형벌이었다. 로마 시민권자가 사형선고를 받으면 십자형이 아닌, 참수형에 처해졌다. 바오로는 이 점을 파고들었다.
“나는 황제에게 상소합니다.”(사도 25,11)
상소할 수 있는 권리가 받아들여졌다. 로마에 한 번도 가본 일이 없는 로마 시민! 바오로는 그렇게 로마로 압송된다. 이 과정에서 바오로는 이미 순교를 각오한 듯 보인다. 바오로는 자신을 경기장에서 죽음에 처해진 사람과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사도들을 사형선고를 받은 자처럼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과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된 것입니다.”(1코린 4,9)
어쨌든, 그는 배를 타고 팔레스타인 해안을 떠났고 오늘날의 레바논, 키프로스, 그리스, 몰타를 거쳐 로마로 가는 파란만장한 여정에 올랐다.(사도 27,1-28,15 참조) 우여곡절 끝에 로마에 도착한 바오로는 재판을 기다리는 2년 동안에도 복음을 전파했다.
“바오로는 자기의 셋집에서 만 이 년 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사도 28,30-31)
사도 바오로에 대한 신약성경의 기록은 여기서 끝난다. 바오로 사도는 이후 로마 네로 황제 치세 기간에 순교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정확한 시기에 63년, 65년 등 여러 학설이 있다. 참고로 히에로니무스 성인은 바오로 사도가 67년에 순교했다고 보고 있으며, 에우세비우스는 그의 책 연대기에서 68년에 순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의 길은 고난의 길이었다. 45~49년까지 키프로스,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라오디케이아를 전교했고, 이후 49~52년까지 앞서 방문한 곳에 세운 교회들을 다시 방문한 뒤, 최초로 아시아를 넘어 유럽 대륙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이때 바오로가 방문한 곳이 필리피, 테살로니카 등이다. 바오로는 당시 유럽 문명의 중심이었던 아테네에도 교회를 세우고 싶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는 신약성경에 ‘아테네서’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바오로의 복음 선포 활동에는 늘 고난이 함께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교회를 탄압하는 사람들에게 박해와 냉대, 학대를 받았다. 감옥에 갇히는 것은 기본. 유대인들에게 매를 맞기도 했으며, 로마인들에게도 태형을 세 번이나 당했다. 바다를 항해할 때, 배가 난파해 일주일 동안 표류하며 죽음의 공포와 맞닥뜨려야 했던 때도 있었다.(2코린 11,23-27 참조) 이런 고난 속에서 바오로는 3회에 걸쳐 전교 여행을 수행해 냈고, 이를 통해 거대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기틀을 놓았다. 그 소임을 끝낸 후…. 그는 로마에서 참수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