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현 인정 25주년… 제노사이드 12년 앞서 경고한 성모님 메시지 되새긴 순례
르완다 남부의 작은 마을 키베호에 자리한 ‘키베호 발현 경당(Chapel of the Apparitions)’ 내부. 사람들이 성모상 앞에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자리를 뜨지 않았다. 미사를 마친 시그니스 세계총회 참가자들도, 여러 나라에서 온 순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이동 끝에 마주한 키베호의 고요 앞에서는 말보다 기도가 먼저 나왔다.
지난 3~8일 르완다 키갈리에서 2026 시그니스 세계총회 참석차 한자리에 모인 세계 가톨릭 언론인들이 키베호 성모 발현지 ‘통고의 성모 성지’(Shrine of Our Lady of Sorrows)를 순례했다. 키베호는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가톨릭교회의 공식 인정을 받은 성모 발현 성지로, 교회가 키베호 성모 발현을 공식 인정한 지 올해 25주년 됐다. 본지도 이 순례에 동행했다.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아 아프리카 대륙 한복판에 나타나신 성모님 발현 현장을 찾았다.
세 소녀가 만난 ‘말씀의 어머니’
르완다 남부의 작은 마을 키베호는 수도 키갈리에서 약 150㎞ 거리로, 차로 세 시간 넘게 걸려 닿을 수 있다. 시그니스 세계총회가 열린 키갈리 도심의 성 파밀레 호텔을 떠나 도심을 벗어나자 차창 밖 풍경도 달라졌다. 키베호까지 이어지는 도로는 잘 정비돼 있었지만, 길 양옆으로는 흙과 벽돌로 지은 집들이 언덕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대문이나 울타리 없이 길과 맞닿은 집들도 눈에 띄었다. 머리 위에 바나나 송이와 짐을 이고 가는 사람들이 길을 걷고 있었고, 아이들은 지나가는 차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길 끝에서 만난 키베호는 거룩하고도 고요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이 향하는 곳은 화려한 건축물이 아니라 40여 년 전 세 소녀가 성모 마리아를 만났다고 증언한 현장이었다.
키베호에서 처음 성모 발현을 체험했다고 증언한 이는 당시 키베호 학교 학생이던 알폰신 무무레케양이었다. 소녀는 1981년 11월 28일 학교 식당에 있던 그의 앞에 성모님이 나타나셨다고 증언했다. 성모님은 이후에도 나탈리 무카마짐파카양과 마리 클레르 무칸강고양에게도 나타나셨다.
성모님은 키냐르완다어로 자신을 ‘니나 와 잠보(Nyina wa Jambo)’, 곧 ‘말씀의 어머니(Mother of the Word)’라고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메시지의 중심에는 회개와 기도, 고통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삶, 그리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가라는 요청이 있었다.
이후 키베호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은 발현 중에 함께 전해진 참혹한 환시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44년 전인 1982년 8월 15일 성모님 발현에서는 피와 시신, 사람들이 서로를 살육하는 참혹한 장면이 환시로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12년 뒤인 1994년 르완다에서 실제 집단학살 사건(제노사이드)이 벌어져 약 80만 명이 목숨을 잃으면서, 이 환시는 훗날 그 비극을 앞서 보여준 경고였다는 해석과 함께 널리 알려지게 됐다.
교회는 발현의 진위 여부를 살피기 위해 1982년부터 의학위원회와 신학위원회를 꾸려 장기간 검증을 이어갔다. 그리고 2001년 6월 29일 당시 기콩고로교구장 아우구스탱 미사고 주교는 교회 지침과 조사위원회 연구 결과를 토대로 알폰신과 나탈리, 마리 클레르 세 소녀에게 일어난 발현의 진정성을 공식 인정했다. 교황청 공보실도 이날 미사고 주교의 최종 선언문을 공식 발표했다. 올해 그로부터 꼭 25년이 됐다.
성지에도 이를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현수막에는 ‘교회가 키베호 성모 발현을 인정한 지 25년’이라는 문구와 함께 ‘말씀의 어머니의 메시지를 더욱 충실히 받아들이고 살아가자’는 뜻이 적혀 있었다.
“성모상이 아니라 현존을 만나러 온 것”
시그니스 참가자들은 프랑수아 하레리마나 신부의 안내를 따라 성지 곳곳을 둘러봤다. 발현 당시 이곳에는 베네비키라 수녀회가 운영하던 여학교가 있었다. 학생들이 식사하던 공간과 기숙사가 있었고, 최초 발현 역시 이 학교 안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성지에는 옛 학교 기숙사 공간에 마련된 발현 경당을 비롯해 고통의 성모 성당, 발현 광장과 대규모 순례 미사가 봉헌되는 야외 제대 등이 자리하고 있다. 2001년 교황청이 발표한 공식 선언에서도 키베호 마리아 성지의 명칭을 ‘통고의 성모 성지’로 명시하고 있다.
현장 안내판에는 1982년 8월 15일부터 공개 발현이 이 단상에서 이뤄졌다고 적혀 있었다. 교회의 공식 조사에서도 1982~1983년이 공개 발현의 핵심 시기로 다뤄졌으며, 이후 알폰신의 발현 체험은 계속됐고, 성모님은 1989년 11월 28일 마지막으로 발현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레리마나 신부는 ‘말씀의 어머니’라는 칭호에 담긴 의미를 거듭 강조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이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곳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로 부르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레리마나 신부는 이어 “여러분이 이곳에 온 것은 성모상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존’을 만나기 위해 오신 것”이라고 명확히 했다. 성모님이 가리키는 하느님 현존과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미사, 그리고 침묵의 기도
성지를 두루 순례한 참가자들은 옛 학교 기숙사 공간에 마련된 발현 경당에 모여 미사에 참여했다. 하레리마나 신부가 미사를 주례했고, cpbc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사장 성기헌 신부도 공동집전했다.
미사가 후에도 참가자들은 쉽게 자리를 뜨지 않았다. 성모상 앞으로 한 사람씩 다가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기도를 바쳤다. 통고의 성모 성지는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순례객들이 계속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이들이지만, 성모상 앞에서는 모두 같은 자세, 같은 침묵으로 머물렀다.
하레리마나 신부는 강론을 통해 키베호의 성모님 메시지와 맞닿은 르완다 현대사의 비극을 함께 전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훗날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자매를 외면했고, 그들을 죽였습니다.” 1994년 르완다를 뒤덮은 내전 중에 후투 극단주의 세력이 투치족과 온건파 후투족 등을 조직적으로 학살하면서 80만 명 이상이 희생된 제노사이드의 상처를 되짚은 것이다.
하레리마나 신부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설명하면서 “이웃을 버리는 대신 자신을 버려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어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것을 형제의 어깨 위에 올려놓지 말아야 한다”며 “그 십자가가 구원을 가져오는 것임을 알고 직접 져야 하며, 그렇게 할 때 예수님처럼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놓을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여러분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이 먼저”
“여러분은 시그니스라는 이름으로 함께 이곳에 왔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은 여러분의 그리스도인 정체성 다음에 오는 것입니다.”
사제의 강론은 키베호를 순례하며 미사에 참여한 세계 가톨릭 미디어 종사자들에게도 향했다. 가톨릭 언론인이라는 직업적 정체성보다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신앙의 정체성이 앞서야 한다는 당부였다. 특히 1994년 제노사이드 당시 일부 르완다 언론이 증오를 확산시키고 학살을 선동하는 도구로 이용된 역사가 있었던만큼, 이곳 키베호 통고의 성모 성지를 찾은 세계 가톨릭 언론인들은 언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 그 역할을 다시 되새길 수 있는 순례이기도 했다.
하레리마나 신부는 “여러분이 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 뒤에 따라오는 것”이라며, 이를 통해 다른 이들이 신앙 안에서 성장하도록 도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순례의 마지막에는 키베호에 자리한 샘에 대한 소개도 이어졌다. 하레리마나 신부는 이 샘이 2011년 8월 14일 축복됐다면서, 물은 순수와 깨끗함, 생명과 하느님 축복을 상징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시그니스 참가자들의 활동을 ‘성모님의 꽃’에 빗대어 당부를 건넸다.
“여러분이 하는 일에서, 그리고 미디어를 통해 전하는 말과 메시지 안에서 여러분은 성모님의 좋은 꽃이 되십시오. 사랑의 아름다움과 믿음의 힘, 희망의 기쁨으로 다른 이들을 이끄는 꽃이 되십시오.”
30여 년 전 증오와 폭력이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르완다. 그리고 그 비극에 앞서 성모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회개와 화해를 요청하는 메시지가 전해졌던 키베호. 그 땅에서 세계 각국 가톨릭 언론인들은 다시 경건한 마음으로 미디어 사도직을 수행해 나갈 것을 다짐했다. 이들은 무엇을 세상에 전할 것인지에 앞서, 자신이 먼저 어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성찰하는 순례였다.
르완다 키베호=김정아 기자 junagkim@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