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없다는 건 정말 안 되는 거예요."
92세 수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하더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광복 81주년을 앞두고 만난 한국순교복자수녀회 황우경 스테파노 수녀에게 광복은 어린 시절 몸으로 겪은 기억이었다.
광복 당일 구체적인 장면이 모두 기억나는 것은 아니다. 당시 10살 어린 아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가지 기억만큼은 81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하다.
일제강점기 학교에선 일본말만 써야 했다. 한국말을 하면 회초리로 손등이나 종아리를 맞았다.
먹고 사는 일도 자유롭지 않았다. 과일과 곡식은 배급됐고, 집에 있던 놋그릇마저 전쟁 물자를 만든다며 가져갔다.
가족의 끼니를 걱정하던 어머니는 시골에서 구한 쌀을 그냥 가져올 수 없어 바지를 누비고 그 안에 숨겨왔다.
그랬던 세상이 광복과 함께 달라졌다. 학교에서 한국말을 쓸 수 있게 됐고, 배급제도 사라졌다.
"나라가 없다는 건…"
황 수녀에게 광복절의 의미를 묻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대단한 거예요. 정말 눈물 나는 거예요."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나라가 없다는 건 정말 안 되는 거예요. 자유도 없고 개성도 없고. 일종의 종과 같은 거예요. 더 길어졌으면 큰 일 날 뻔 했어요."
한국말을 쓰지 못하고 고유의 문화를 마음대로 누리지 못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나온 말이다.
젊은 세대에게 광복의 의미를 전해달라는 질문에도 답변은 단호했다.
"속국이 되면 안 돼요. 한국 사람에겐 한국 고유의 문화와 정신이 있잖아요. 일본 사람들이 그걸 다 짓밟아서…"
황 수녀가 말하는 것은 분명했다. 한국 사람에겐 한국 고유의 문화와 정신이 있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수녀가 되어 의사가 되다
황 수녀는 한국전쟁 휴전 이듬해인 1954년 한국순교복자수녀회에 입회했다.
성소를 고민하던 고교 시절, 교장 선생님의 권유로 수녀회를 알게 됐고 "홀딱 반했다"고 회고했다.
학교에서 1등을 했을 만큼 성적이 뛰어났던 황 수녀에게 창설자인 방유룡 신부는 공부를 계속할 것을 권했다.
황 수녀는 "의과를 하고 싶다"고 말했고,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수녀이자 의사로 환자들을 돌본 황 수녀는 인천성모자애병원(현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병원장까지 역임했다.
1978년부터 1986년까지는 수녀회 총장으로 수도공동체를 이끌었다.
후배 수녀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면 좋겠냐고 묻자, 황 수녀는 다시 '나라' 이야기를 꺼냈다.
"수도 생활을 잘해야죠. 그렇지만 나라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안 돼요. 진짜 나라 사랑을 해야 돼요."
광복을 겪은 황 수녀가 말하는 '나라 사랑'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한국말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 우리 문화를 지킬 수 있는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유가 어떻게 주어졌는지를 잊지 않는 것이다.
태극기를 들자 다시 뛴 가슴
황 수녀를 만난 13일 아침,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녀들은 청파동 수녀원에서 태극기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황 수녀는 자료실을 맡고 있는 박수란 수녀에게 "가슴이 뛴다"고 말했다.
열 살 소녀가 경험한 광복은 이제 온전한 기억으로 남아 있진 않다.
하지만 한국말을 쓰면 맞았던 기억, 배급을 받아 먹었던 기억, 그리고 해방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던 기억은 살아 있다.
그 기억들이 모여 황 수녀에게 광복의 의미가 됐다.
나라가 있어야 자유를 누릴 수 있고, 고유의 문화를 지킬 수 있다는 것.
열 살에 광복을 맞은 소녀는 92세 수녀가 되어 오늘의 우리에게 말한다.
"진짜 나라 사랑 해야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