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요셉 성인을 너무나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등장하는 복음의 짧은 부분을 아주 세심하게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요셉 성인은 ‘의로운’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그 의로움을 너무나도 섬세한 자비로 실행하셨습니다.
지금은 신자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성모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습니다.
하지만 당대 사람이나 요셉 성인은 이를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의로운 분이셨던 요셉 성인은 당신의 의로움을 바탕으로 이 일을 바로잡으려고 하셨습니다. 그건 바로 ‘파혼’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자비는 이를 ‘남모르게’ 하고자 합니다. 만일 보통 사람이었다면 약혼한 상대가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자식을 임신했다고 외쳐대며 자신의 억울함을 온 세상에 전파하려고 할 것이고 가능하면 상대에게 최악의 복수를 꾀할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상대를 죽이기까지 했을 테지요.
그러나 요셉 성인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정의를 바탕으로 일은 처리하지만 마치 예리한 메스로 상처 부위를 절묘하게 도려내듯이 그것을 남몰래 처리하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은총이 도착합니다.
즉, 천사가 와서 이 일의 전모를 알려주고 요셉 성인을 성가정의 수호자가 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정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닮아 정의와 자비를 지니고 계셨던 요셉 성인은 그렇게 성모님과 아들 예수님의 지상의 보호자가 되십니다.
현실과 마주해서 살아가는 교구 사제로서 언제나 이 긴장 관계를 맞닥뜨리게 됩니다. 즉, 정의를 실행해야 할지, 자비를 실행해야 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것입니다. 일상적으로는 고해소 안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목의 여러 현장에서 이 고민을 자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저는 언제나 요셉 성인을 떠올립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비’의 이미지를 좋아합니다.
뭔가 양순해 보이고 부드러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 곧잘 죄를 짓고 살아가는 처지에서 자비는 참으로 달콤하게 들립니다. 뭐든 다 용서해 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잊고 있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하느님은 정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정의는 완전한 정의입니다. 한 치의 억울함도 남아 있지 않을 정의를 하느님은 실행하실 수 있고 실행하실 것입니다.
자비는 정의를 실행하기를 주저하는 상태를 변명하기 위한 것으로 쓰여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그 자비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악의 습성을 더욱 강화시켜 주기도 합니다. 즉 알코올 중독이 걸린 사람이 술을 달라고 한다고 해서 술을 계속 주면 그의 중독 상태는 더욱 강화되고 더욱 깊어지는 것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싫은 소리를 듣더라도 그의 술병을 빼앗아야 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다른 한편, 정의는 신중하게 실행되어야 합니다.
정의를 이룬다면서 도리어 상대를 파괴하는 행위를 하는 것을 경계해야 됩니다. 인간은 너무나 나약한 존재라서 정의를 실행한다면서 도리어 악을 자행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정의는 그릇된 것을 바로잡는 최소한의 범주 내에서 극도로 신중하게 실행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제아무리 이 간극 사이를 유념하면서 정의와 자비를 실행한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늘 인간이기에 있을 수밖에 없는 오류가 존재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유념해야 할 것이 바로 하느님의 도움의 손길, 은총입니다. 요셉 성인조차도 최고의 성인이신 성모님에 대해서 오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가장 필요한 순간에 당신의 은총의 손길을 선물해 주십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좋은 영적 가치를 최선을 다해서 사용하지만 그 범주를 넘어서는 영역에 대해서는 하느님에게 맡겨 드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제로 살아가면서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선택과 결정’ 앞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정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렇기에 최선을 다하고 그 이상을 걱정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