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혜서의 저자는 하느님께 이렇게 말한다.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 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지혜 11,24)
나는 하느님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 사랑의 증거는 바로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사랑도, 존재도 스스로 얻어낸 것이 아니다. 살아오면서 혐오스러운 일들을 저질렀다. 어떤 것은 의도적으로 했고, 어떤 것은 의도하지 않았거나 심지어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저질렀다. 그럼에도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다.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나에게 존재를 주시는 그 사랑을 끝낼 수는 없다. 내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신다. 내가 도망치려 해도 하느님께서는 나와 함께 가신다. 내가 죽는다 해도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끝내지 못한다. 하느님의 영원 안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 그렇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나는 죽음 이후에도 존재할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받고 있기에 나는 나와 같은 방식으로 사랑받는 사람들과 온 우주를 향해 그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9)
참으로 위로가 되는 말씀이다. 적어도 나 자신과 내가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희망과 감사의 마음을 품게 해 준다.
하지만 그들은 어떠한가? 바로 악한 사람들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정말 아무런 구별 없이 스탈린, 히틀러, 폴 포트와 같은 역사 속 괴물들까지도 존재하게 하실 만큼 사랑하시는 것일까? 오늘날 우리 사회와 정치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는 어떠한가? 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미워하셔야 하지 않는가? 그들의 존재를 끝내 버리셔야 하지 않는가?
하느님의 정의가 무엇을 의미하든, 사랑이신 하느님께 그 정의는 사랑하기를 멈추는 것을 포함하지 않는 듯하다.
분열과 양극화, 비난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오늘날, 우리는 나와 정치적 견해나 미적 감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랑받기는커녕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여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도 한다. 자신과 의견이나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뿐 아니라 실제 폭력을 행사한다. 우리는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곧 사랑받고 있다는 의미임을 잊고 살거나, 때로는 의도적으로 외면한다.
예수님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마태 20,1-16 참조)는 포도밭 주인이 일할 품꾼들을 고용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주인은 여러 차례 나가 일꾼들을 찾고, 심지어 일이 끝나기 직전까지 사람들을 고용한다. 그리고 하루가 끝났을 때 모든 사람에게 같은 품삯을 준다.
그러자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은 포도밭 주인이 늦게 온 사람들에게 베푼 관대함은 부당하다며 불평한다. 이에 주인의 대답은 본질적으로 이렇다. “네 일이나 신경 써라. 나는 내 돈을 내가 원하는 대로 사용할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다고 내가 판단한 사람들을 향한 나의 태도는 하루 종일 일한 일꾼들과 같은 모습이 아닌가? 나는 이렇게 말한다. “저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나는 내 사랑을 내가 원하는 대로 베풀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극도로 분열되고 서로를 비난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쉽게 증오에 빠진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특히 정치 지도자들이 저지르는 많은 일들, 곧 전쟁과 불의, 인종차별,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종교의 악용, 민주주의의 훼손 등은 증오스러운 일이며 우리는 이에 맞서야 한다.
그러나 그 행위를 저지르는 사람들에 관해서는 그들의 존재 자체가 하느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증거라는 사실을 마주해야 한다. 심판의 순간이 되면, 그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소명을 어떻게 저버렸는지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비난받아야 할 존재라기보다, 불쌍히 여기고 기도해야 할 존재다.

글 _ 윌리엄 그림 신부
메리놀 외방 전교회 사제로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 주교회의가 발행하는 주간 가톨릭신문 편집주간을 지내기도 했다. 현재는 아시아가톨릭뉴스(UCAN) 발행인으로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