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니발레 카라치, 그리스도와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캔버스에 유채, 170×225cm, 1594~1595년, 브레라 미술관, 이탈리아 밀라노
태어날 때부터 ‘모태 신앙’인 분들의 경우, 이미 어릴 때 세례를 받거나 초등학교 가서 첫영성체 교리반에서 교리 공부를 한 후 첫영성체를 합니다. 그러다 중학교 혹은 고등학교에서 견진을 받곤 하지요. 그렇지 않은 경우, 즉 성인이 되어서 천주교 신자가 되는 경우는 일정한 기간 성당 교리실에서 꾸준히 교리를 배운 후 주임 신부님 찰고를 한 후, 세례를 받습니다.
교리를 가르치는 분의 경우는 신부님 혹은 수녀님이 하거나 혹은 전문적으로 교리 공부를 배운 분들입니다. 그리고 예비 신자들은 교회가 지정한 교리서를 통해 교리 내용을 배워 하나씩 알게 되고, 차츰 기본적인 기도문도 암송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천주교에 입문하려는 예비 신자의 경우 요즘은 예전과 달리 잘 갖추어진 시스템 안에서 교리 공부를 합니다.
그러나 조선에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1784년 이후,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거나 예비자를 입교시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1791년 조선 정부에서 천주교 신앙에 대한 금령을 내린 이후에는 오가작통법과 연좌제 등으로 인해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천주교를 믿게 되면 가족 모두가 잡혀가게 됩니다. 그래서 박해 시기에 천주교 신앙 전파뿐 아니라 교리 공부를 하는 데는 무척 어려움이 컸습니다.
1876년 조선의 개항 이후 1886년 조선과 프랑스의 조약, 1895년 뮈텔 주교와 고종 황제의 만남 등 점차 천주교 신앙에 대한 자유의 분위기가 형성되어 갔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천주교 신앙에 대한 박해와 금령의 여파로 인해 천주교 신앙을 믿고, 전파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한 상황은 1900년대에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여교우의 천주교 신앙 입문 과정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 하나를 전해 드릴까 합니다.
이는 1902년 당시 강원도 지역에서 사목 활동을 하던 뒤테르트르 신부님께서 남기신 사목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사례의 핵심은 어느 한 여교우가 보여준 신앙의 모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 여교우가 세례받기 전, 남편과 함께 천주교 교리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시아버지의 노여움에 여교우의 남편은 교리 공부를 도중에 그만두고 말았답니다. 그러자 여교우인 아내는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무엇을 한가지 시작하면 끝을 맺어야지요. 천주교를 믿기 시작했는데 왜 그만두세요? 남자가 그렇게 행동하면 안 돼요. 난 여자에 지나지 않지만, 당신 대신 내가 믿겠어요. 그리고 한번 믿으면 죽을 때까지 믿겠어요.”
그리고 여교우는 그 약속을 지키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적으로 볼 때 시아버지 때문에 그 여교우는 집에서 교리 공부를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신자 집을 공개적으로 찾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교우는 이웃의 천주교 신자들과 약속을 했습니다. 즉, 마을에는 우물이 하나밖에 없는데, 동네에서 좀 떨어진 곳에 위치했기에, 그녀가 물을 길으러 가는 척하여 하루에 여러 차례 우물이 있는 곳으로 가면 동네 다른 여교우들이 돌아가면서 우물로 찾아가서 그 여교우에게 입으로 교리를 가르쳐 주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마침내 여교우는 동네 신자들 덕분에 천주교의 주요 기도문과 교리 문답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뒤테르트르 신부님은 그 여교우에게 ‘모니카’라는 본명으로 영세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그 여교우의 남편도 다시금 교리 공부를 시작했고, 더욱 좋은 일은 그 여교우의 시아버지가 죽음에 임박하여 며느리인 여교우의 설득과 눈물로 영세를 받은 것입니다. 그 여교우의 시아버지는 훌륭한 마음 자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가족의 반대가 여전히 신앙 전파의 큰 걸림돌이 되던 1900년대 초! 부부가 함께 예비자 공부를 하다가 남편이 가족의 반대로 도중에 포기하고, 아내 혼자 교리를 배워야 할 상황이 놓였을 때의 난감함을 생각해 봅니다. 남녀의 차별이 생생하던 시절, 여자 혼자서 천주교 신앙 입문을 위해 예비자 교리를 배우기가 어려웠던 그 시절! 그러나 마을마다 동네 여성들의 속마음을 풀어내는 장소로 사용되던 우물가, 바로 그곳을 활용하여 신자들이 돌아가면서 예비자의 교리 공부를 시켜주던 그 모습은 생각만 해도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천주교 신자가 되려는 여교우의 마음도 마음이지만, 그 여교우에게 교리 공부를 도와주려고 우물가에 교대로 찾아와서 신앙에 도움을 준 선배 신자들의 모습. 천주교에 입문하려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던 신앙 선조들의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되기 위해 교회로 발을 내디딜 때, 그 발걸음에 발을 맞추어 주는 동료 신자들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도 본받을 마음 자세가 아닐까요?
예비자 한 사람의 신앙 입교가 마치 우리 모두의 기쁨인 양 그런 관심을 가진다면 그 예비자는 신앙인이 된다는 것에 대한 큰 자부심을 가지며 살지 않을까 합니다. 오늘도, 성당 교리실에 가서 예비자 교리를 받는 분들과 그들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분들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주님의 은총과 자비를 간절히 청해 봅니다.
글 _ 강석진 신부 (요셉,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1988년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 입회, 1997년 종신서원을 했으며, 1998년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서강대학교에서 상담심리를 공부하고, 가톨릭대학교에서 역사 신학을 전공했다. 현재 전주교구 내 ‘개갑 순교성지’(전북 고창 소재)에서 성지 담당 소임을 맡고 있다. 저서로 「강석진 신부의 인생 수업」(가족편, 관계편), 「순교, 생명을 대변하는 증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