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실 기자(힐데가르트)
찬란한 여름의 끝자락을 제주에서 보내고 왔다. 살러 갔다기엔 짧고, 여행이라기엔 긴 20일, 놀멍쉬멍 제주 동쪽 절반을 찬찬히 훑는 일정이었다. 따가운 여름 햇살에 흙감자가 돼서 돌아오니 “어떻게 그렇게 길게 시간을 냈느냐?”며 주변에서 신기해한다. 글쎄요. 직장에 매여있던 몸이 자유로워져서?
리처드 로어 신부님의 책 「위쪽으로 떨어지다」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넘어지고 추락해야 한다. 얼마 동안은 실제로 운전석에서 쫓겨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진짜 안내인한테 자기를 내어 맡기는 법을 끝내 배우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필수과정이다.”
5년 전 우리 부부는 차례로 인생의 운전대를 뺏겼다. 그 일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인삼각 하듯 버티며 어떻게든 속세에서 시간을 벌었을 텐데, 하느님께서는 둘 다 냉큼 일어나라며 엉덩이를 걷어차셨다.
먼저 내가 대규모 정리해고에 휩쓸렸고, 남편도 사내 정치에 휘말려 퇴사를 종용받았다. 사십 대 중반, 이제 인생이 좀 선명하게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게 안갯속이었다. 전력을 다해 해고무효 확인소송에 돌입했다. 다행히 승소해 6개월 만에 복직했지만 이미 나는 상처투성이였다. 직장에 영혼과 육신을 갈아 넣던 ‘과거의 나’는 실종돼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남편과 처음으로 제주 한달살이를 떠났다. 한라산을 오르고, 올레길을 걸었다. 수천 년의 시간을 견딘 바다와 숲을 바라보며 내 삶이 얼마나 찰나인지 온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로어 신부님 말씀처럼 역설적으로 실패와 몰락이 우리로 하여금 그 일이 없었으면 결코 보지 못했을 것을 억지로 보게 한다.
지난한 시간 끝에 우리는 이제 둘 다 비정규직 근로자가 됐다. 월급은 줄었지만, 업무 외 시간이 늘어나 함께 살림하고, 운동하고, 여행하며 살고 있다.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하고, 주말에나 함께 식사할 때는 잘 몰랐는데, 이제야 진정한 삶의 동반자가 된 느낌이다. 아마도 우리가 그 일을 겪지 않았다면 제주 한달살이는 ‘기약 없는 나중’의 일이지 않았을까. 하느님을 치열하게 알아가는 일도, 지금 하는 여러 봉사활동도 뒷전이 됐을 게 분명하다.
그때의 나는 “천국은 천국이고, 살아서도 누릴 건 다 누려야지”라며 양보가 없었다. 부자도 되고 싶고, 승진도 해야겠고, 성공도 하고 싶었다. 모든 경쟁에서 이기려고 눈에 불을 켜느라 정작 내가 딛고 있는 세계가 균열하고 있다는 걸 애써 모른 체했다. 그때 하느님은 폭풍 속으로 우리를 던져 더 높고, 영원한 세계를 올려다보게 하셨다.
170년 전 제주 출신 어부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1816~1867)는 한겨울 풍랑 속에서 하느님을 만난다. 한 달여를 표류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는데 도착한 곳은 홍콩이었다. 놀랍게도 그곳에서 조선인 신학생을 만나 하느님을 알게 되고 세례까지 받게 된다. 그렇게 41세의 조선 어부는 생사의 고비를 넘은 지 3개월 만에 제주의 첫 영세자가 된다. 놀라운 신비다. 3년 만에 제주로 돌아온 김기량은 병인박해로 순교하기까지 10년을 불꽃처럼 살다 간다. 그에게 생의 마지막 10년은 찬란한 부활의 날들이었다.
하느님을 만나기 전 김기량에게 배는 목숨줄이었다. 우리 부부에게는 회사가 그랬다. 그때 하느님의 호된 등짝 스매싱이 날아왔다. 영국의 은수자 레이디 줄리안은 말한다. “먼저 추락이 있다. 그 다음에 추락으로부터의 회복이 있다. 둘 다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이다.”
두려움 끝에 다시 일어선 인생의 두 번째 여정은 하느님과 함께다. 삶에 안주하지 말고 저 멀리 영혼의 고향을 바라보라고 오늘도 하느님은 우리를 이끄신다. 자꾸만 잊어버리지만 우리 모두는 순례자고, 우리의 집은 길 위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