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오박해 180주년을 기념해 한국교회사연구소와 한님성서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심포지엄이 서울대교구청에서 열리고 있다. 장현민 기자
병오박해(1846) 180주년을 맞아 순교자 자신과 그들의 행적을 기록·증언한 이들이 ‘순교’와 ‘순교자’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핀 연구가 발표됐다. 한국교회사연구소와 한님성서연구소는 9월 17일 서울대교구청에서 ‘박해와 순교’를 주제로 공동 심포지엄을 열었다.
병오박해는 신유(1801)·기해(1839)·병인(1866)박해와 달리 조선 정부의 공식적인 천주교 옥사 과정을 거치지 않았고, 범위와 기간도 좁고 짧았다. 그러나 ‘한국인 첫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성 현석문(가롤로)은 군문효수를 당했고, 다른 일곱 신자는 포도청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들 순교자 9위는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됐다.
이석원(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은 김대건 신부의 자필 서한과 선교 사제들의 순교자 약전, 시복 재판 증언록을 분석했다. 그는 김 신부가 마지막 서한인 옥중 회유문에서 순교를 ‘벼가 여무는 것’에 빗댔다고 풀이했다. 하느님을 농부에 빗댄 비유로, 고난이 신앙을 여물게 하고 순교가 그 믿음의 성숙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김 신부가 박해를 세속·마귀·육신과 싸우는 전투로 보고 순교로 승리하리라 확신했다는 해석도 제시했다. 이 연구실장은 이러한 인식이 당시 교회에서도 공유돼, 김 신부의 회유문이 신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줬을 것으로 봤다.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도 1846년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추진하면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보낸 서한에 “자기 형제들이 복자(나 성인들)의 대열에 올라서는 본보기를 보게 된다면, 조선 신자들은 고통을 받게 되더라도 훨씬 더 강건한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믿는다”고 썼다.
김 신부와 달리 다른 병오박해 순교자 8명의 인식은 주변 사람들의 기록을 통해 살펴야 한다. 이 연구실장은 현석문이 감옥에서 동료들에게 “아무쪼록 위주치명하자”고 권했다는 증언을 소개했다. 아울러 “역설적이지만 배교자들의 목격 증언이 가장 구체적이고 사실에 가까웠다”고 평가하며 임성실이 아버지 성 임치백(요셉)의 최후를, 오 바르바라가 동료 신자들의 옥중 생활을 전한 사례를 들기도 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가족과 지인을 거쳐 시복 재판 기록에 남았다.
한님성서연구소 소장 정태현 신부가 병오박해 180주년 기념 한국교회사연구소와의 공동 심포지엄에서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 장현민 기자
한편 한님성서연구소장 정태현 신부는 기조강연에서 “순교는 증언의 목적이 아니라 결과”라고 표현했다. 이어 순교를 구약의 하느님과 율법,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증언이자 부활의 희망, 박해자를 향한 사랑과 용서, 교회 성장의 밑거름으로 요약했다. 신앙을 삶으로 증언하는 ‘백색 순교’도 강조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장 조한건 신부는 한국 교회사를 순교와 선교가 함께 이룬 역사로 봤다. 조선의 박해에는 조상 제사 문제뿐 아니라 국가가 지키려 한 사회 질서와 정치적 상황도 얽혀있다고 설명했다. 조 신부는 또 순교자의 증언을 조선 정부의 형정 기록과 대조하고, 더 풍부한 자료를 활용해 성인전과 복자전을 새로 써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이제는 ‘순교(殉敎)’에서 ‘선교(宣敎)’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