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신생아 (Le Nouveau-ne) 조르주 드 라투르 (Georges de La Tour, 1593~1652)
[월간 꿈CUM] 그리는 꿈CUM _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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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드 라투르, 신생아, 캔버스에 유채, 76×91㎝, 1645~1650경, 렌 미술관, 프랑스
폭이 넓은 그림이다. 그림의 가로 길이가 몇 cm인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그 감상의 폭과 범위가 다양하다는 말이다.
신앙인들은 조르주 드 라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의 이 그림에서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 그리고 예수의 외할머니 성 안나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 그림의 제목은 ‘아기 예수의 탄생’이 아니다. ‘신생아’(갓난아기, Le Nouveau-ne)다.
그런데 묘한 것이 ‘아기 예수’를 묵상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데, 예수 탄생 의미가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더 나아가 이 그림에서는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도 느껴진다.
그 경이로움으로 인도하는 표현방식 또한 독특하다. 탄생은 밝고 환하고 기쁜 것인데, 이 그림은 전체적으로 어둡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아기에게 집중되어 있다. 왼쪽 여인이 손으로 초를 가려서 아기에게 빛이 향하도록 모아주기 때문이다. 그 어둠 속 평온한 빛이 우리를 경건함으로 이끈다.
화가는 왜 이런 묘한 그림을 그렸을까.
이를 알기 위해선 먼저 화가의 삶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조르주 드 라투르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극과 극을 오간다. 전쟁과 페스트, 약탈 등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탓에 평생 고통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상당한 재력가 신분으로 민중을 억압하고 박해하는 데 앞장섰다는 기록도 있다.
어쨌든 그가 천사와 악마, 선행과 악행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의 그림에는 항상 현실을 떠나 이상향으로 도피한 흔적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관조적이며 차분한 분위기다. 들떠 있지 않고, 종교적 명상을 지향한다.
어쩌면 그는 죄인이었던 세리를 부르시는 예수의 품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가까운 이웃에게 모질게 대하다가 정작 혼자 있을 때는 펑펑 눈물 흘리는 그런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악인이었건 선한 사람이었건 상관없다. 그가 세리였건 창녀였건 상관없다. 그에대한 평가는 예수 몫이지 내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꿈꿨던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는 구원에 대한 희망, 회개의 열망이 깊게 배어 있다. 영성으로 고양된 인간성에의 깊은 통찰이 느껴진다. 게다가 그 심오한 명상을 후대의 수많은 사람이 함께 나누고 있다. 그러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