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사회에서는 안락사를 ‘자비에 의한 죽음’(mercy killing)으로 종종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 네덜란드에서 두 살도 채 되지 않은 아동에게 안락사가 시행돼 논란이 일고 있다. 과연 이 죽음을 ‘자비’라고 부를 수 있을까.
네덜란드 주교회의 의장 빔 에이크 추기경은 9월 25일 미국 가톨릭 매체 크럭스와의 인터뷰에서 진정한 ‘자비’의 의미를 짚으며 “요즘 들어 ‘자비’란 단어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자주 이용되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일명 ‘오해된 자비’를 지적한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안락사가 시행된 두 살 미만 아동은 임신 26주 만에 조산으로 태어나 뇌 손상을 입었다. 이후 뇌성마비와 시력 장애를 앓았으며, 간질 발작을 일으키고 폐에 점액이 차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등 고통을 겪었다. 이에 부모와 의사는 결국 아이의 안락사를 결정했다. 네덜란드가 2024년 1~12세 중증질환 아동의 안락사를 허용한 이후 확인된 첫 사례다. 네덜란드의 생명종결심사위원회는 안락사를 시행한 의사가 주의 의무를 다했다고 판단했지만, 일부 의사들은 그 결정에 동의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에이크 추기경은 “인간의 근본 존엄성을 침해해 생명을 빼앗는 것이 과연 자비로운 행위가 맞느냐”면서 “진정 자비로운 행위는 환자에게 ‘적절한 치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에이크 추기경이 말한 적절한 치료는 환자의 통증과 여러 증상을 조절해 고통을 덜어주는 ‘완화의료’다.
에이크 추기경은 “일반적인 완화의료가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수준으로 줄이기에 충분하지 않다면, 완화적 진정 요법을 사용해볼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완화적 진정 요법은 다른 방법으로 조절하기 어려운 극심한 증상을 완화하기 위해 의식을 필요한 정도로 낮추는 데 사용된다.
에이크 추기경은 “진통제나 다른 방법을 써도 환자의 고통스러운 증상이 견딜 수 있는 수준으로 조절되지 않는다면, 증상을 완화하는 데 필요한 정도까지 진정제를 투여해 의식을 낮출 수 있다”면서, 다만 이 경우에도 영양과 수분 공급은 계속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는 행위 자체는 선하거나 중립적이지만, 그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은 나쁜 결과가 뒤따를 수 있을 때 일정한 조건 아래 그 행위를 허용할 수 있다는 가톨릭 윤리의 ‘이중결과의 원리’와 관련된다. 완화적 진정과 안락사를 가르는 핵심 역시 환자의 죽음을 의도하느냐에 있다. 에이크 추기경은 “의식을 억제할 때 환자는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며 “그러나 사망 자체가 진정제 투여의 목적은 아니며, 오히려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에이크 추기경은 “서구 사회의 많은 이가 장애를 안고 사는 삶보다 죽음을 선호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그러나 이러한 문화는 고통과 장애에 대처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낸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