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교구 이승훈베드로성지기념관에서 인천교회사연구소와 기념관이 '인천과 이승훈'을 제주로 공동 주최한 개관 기념 학술 심포지엄이 열리고 있다. 인천교회사연구소 제공
‘한국 교회 첫 영세자’ 하느님의 종 이승훈(베드로)의 증손자인 순교자 형제의 이름과 가족관계가 잘못 알려져 왔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인천교구 이승훈베드로성지기념관이 9월 18일 ‘인천과 이승훈’을 주제로 인천교회사연구소와 공동 주최한 개관 기념 학술 심포지엄에서다.
조지형(하상 바오로, 전남대학교) 교수는 조선 정부와 교회 기록, 평창 이씨 족보, 1871년 신미양요 당시 인천의 상황을 기록한 「소성진중일지」를 대조해 이승훈 후손 순교자들의 이름과 가족관계를 검토했다. 조 교수는 1871년 인천 제물진두에서 순교한 ‘이연귀·균귀’ 형제 가운데 동생의 이름을 「고종실록」과 「일성록」 등에 따라 ‘이균학’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밝혔다. 형제의 아버지도 이승훈의 손자 이재의가 아닌, 또 다른 손자 이재겸이라고 분석했다.
또 1919년 편찬된 평창 이씨 족보를 근거로 이재겸의 아들 이희호·정호가 각각 연귀·균학의 본명이며, 연귀와 균학은 자(字)라고 밝혔다. 기존에 형제의 본명으로 알려진 이천호는 해당 족보에 일찍 사망한 것으로 기록됐고, 이만호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일부 연구에서 이승훈의 후손으로 여겼던 ‘이명현’은 ‘손명현’을 잘못 해석하면서 생겨난 인물이라고 짚었다. 「일성록」의 ‘孫明玄’을 ‘손자 명현’이 아닌 ‘손씨 성을 가진 명현’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소성진중일지」에 기록된 부평에서 붙잡혀 온 남자 두 명과 여자 한 명이 「일성록」에 등장하는 손명현·백용석·김아기라고 봤다. 이들은 1871년 음력 5월 18일 이재겸의 아내 정씨와 함께 제물진두에서 처형됐다.
역사학자 방상근(석문 가롤로) 박사는 인천 함박리 교우촌의 형성 시기를 재검토했다. 성 모방 신부가 1839년에 쓴 서한을 근거로 함박리 교우촌이 1838년 여름 이미 존재했다고 밝혔다. 그해 인천 함박리에서 박해가 일어나 작은 교우촌 네 곳이 불안과 공포에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교우촌이 1846년 이후 형성됐다는 기존의 한 견해보다 앞선 기록이다.
방 박사는 1784~1790년 사이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을 통해 인천에 복음이 전해졌을 가능성도 제시했다. 권일신이 인천에 거처를 마련하고 양근을 오간 사실, 인천에서 형 권철신에게 천주교 서적을 깊이 읽어 본 뒤 판단하라고 권하는 편지를 보낸 사실 등에 주목했다.
서종태(스테파노) 호남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은 초기 한국 교회 지도자인 이벽(요한 세례자)과 이승훈의 역할을 검토했다. 서 연구실장은 1785년 명례방 사건 이전에는 이벽이 복음 전파를 주도했으며, 이후에는 가족의 압박으로 교회를 떠났다가 돌아온 이승훈이 공동체를 이끄는 중심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이승훈은 지도자 역할에서 물러난 뒤에도 황사영(알렉시오)에게 천주교 서적을 전하고, 복자 홍익만(안토니오)에게 세례를 주는 등 전교에 관여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