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알아도 하산해야 산 형세를, 지구를 알아도 대기권을 이탈해야 지구 형체를 완전히 파악하듯, 자녀는 낳고 기르신 부모의 사랑을 모르지 않으나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에 이를 절실히 자각한다. 언어·논리로 정의·증명하지 못하다가 나중에 저절로 밝혀지는 ‘대강 아는 어떤 무엇’ 중 하나가 입으로 고백하고 표지로 전달하며 몸으로 체감하는 ‘사랑’이다.
직접 개입도 간접 후원도, 가득 채움도 전부 비움도, 적극적 조력도 소극적 관망도 사랑의 발현 양식이다. 각양각색의 사랑은 세 가지 특성을 도출한다. 첫째, 사랑의 반의어는 없다. 증오·분노나 무관심조차 사랑의 양태일 수 있다. 둘째, 사랑의 유의어는 없다. 유의미한 가치들의 상위 범주인 사랑은 연애·우정·자선·용서의 공통분모다. 셋째, 사랑은 단편적 매료나 한시적 열정과 다르게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역사성을 내포한 서사를 구현한다.
사랑 서사는 세 단계로 구성된다. 1단계는 다른 누구·무엇과 비교·대체 불가한 ‘존재에 대한 긍정’(있음)이다. 존재에 대한 외면·배척은 사랑이 아니다. 2단계는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작용하는 ‘존재에 대한 의미 부여’(살아 있음)다. 의미 약탈, 곧 상대를 종속시켜 지배하는 자기만족은 사랑이 아니다. 3단계는 ‘존재의 궁극적 선을 향한 희망’(영원히 살아 있음)이다. 현시점에 온전히 인지될 수 없는 ‘나와 너’의 공동선에 대한 책임 결여는 사랑이 아니다.
성경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서사’를 세 국면(창조-구원-완성)으로 전개한다. ‘세상 만물을 창조’(있음)하신 하느님은 피조물 중 인간에게 ‘생의 의미를 부여’(살아 있음)한다.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인간이다.”(gloria Dei vivens homo: 리옹의 이레네우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1테살 1,10 참조) “생명의 빵”(요한 6,48), 성자 예수님은 인간을 ‘살리는’(구원하는) 사랑 서사의 정점이다. “영원하신 하느님”(로마 16,26)이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믿는 이에게 ‘궁극적 선’(완성: 영원히 살아 있음)을 기약한다. 이 서사는 이렇게 응축된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간추린 “두 계명”(마태 22,40)의 원리는 “하느님의 사랑”(로마 8,39)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은 ‘하느님에 대한 긍정’(신앙)에 기반한 ‘의미 부여’(고백·찬양)이며, ‘하느님의 궁극적 선을 향한 희망’(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이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은 성경의 약자를 대표하는 ‘이방인, 과부·고아, 가난한 이 등’(탈출 22,20-26 참조)을 포괄하는 ‘이웃에 대한 긍정’을 전제로 진척한 ‘역동적인 살맛의 공유’(의미 부여)이며, ‘자신과 이웃의 궁극적 선을 향한 희망’(영원한 삶을 믿나이다)이다.
“당신의 모습으로”(창세 1,27) 창조된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 파트너이며, 사람의 ‘삶’(life)은 하느님의 ‘사랑’(love) 서사의 무대다. ‘사랑하는’ 하느님이 “살아 계신 참하느님”(1테살 1,9)이며, ‘사랑하는’(loving) 사람이 ‘살아 있는’(living) 참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