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선(베드로, 서울 노곡중학교 교사) 팍스크리스티 코리아 상임대표
1987년 봄,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학교가 있는 강서구 발산동까지 최루탄 냄새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도시 전체가 민주화 운동의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대학생뿐 아니라 이른바 ‘넥타이 부대’라고 하는 일반 회사원까지 시위에 가담했다. 그사이 고등학생들도 시국을 관망할 수 없다는 움직임이 있었다. 수는 많지 않았지만, 고등학생들이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해 12월에는 서울시 내 스무 개 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서울지역고등학생연합(서고련)’이 결성돼 명동에서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서고련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나도 그런 부류의 학생이었다.
1986년 여름, 은사님 한 분이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해직됐다. 일부 학생들이 그 선생님의 복직을 위한 집회와 서명운동에 나섰다. 뜻은 거창했지만, 고작 스무 명 정도의 학생이 서명에 참여하고, 교문 앞 시위는 사전에 발각되어 여남은 명이 모였다가 해산되는 해프닝으로 끝났다. 종로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학교에 찾아와 주모자로 지목된 나를 참고인으로 조사했다. 교장 선생님이 직접 아버지를 불러 자녀가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을 하지 않도록 잘 지도해 달라고 타일렀다. 주말에도 공장에 나가던 아버지는 그날 출근을 못 하고 교장실에 가서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를 했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나를 앉혀 놓고 다시는 이런 일에 가담하지 말라고 했다. 볼펜으로 공책에다가 일종의 도표를 그리면서 사회에 반항하면 죽는다고 화를 냈다. 그때는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이나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을 뜻하는 줄 알았다. 세월이 많이 지나서 할아버지, 그러니까 아버지의 아버지가 국민보도연맹 예비검속 사건의 희생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체제에 반대하면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한 건 당신의 아버지를 두고 한 이야기였다.
집안 어른들은 오래도록 그 일을 쉬쉬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이미 돌아가신 분들이 이야기해준 기억의 파편뿐이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면사무소 서기로 일하다가 사범학교 입시를 위해 공부하던 할아버지는 1950년 초여름 부여경찰서에 끌려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추정이지만, 경찰들은 할아버지를 백마강 나루터에서 사살하고 시신은 강으로 떠내려 보낸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시신은 수습하지 못했다. 부여군 내산면 묘원리에 조성된 무덤은 빈 무덤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이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는 “이 일 때문에, 평생 밑바닥 인생을 살았어”라고 간략히 답했다.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 이번에는 반대로 경찰과 공무원들이 살해되었다. 이른바 적대 세력에 의한 희생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한 동네 살던 사람들이 원수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넘었다. 지금 우리는 그럭저럭 다 같이 살고 있다. 아마 구드래 나루터에서 할아버지에게 방아쇠를 당기고 사체를 강물에 던진 사람들의 후손도 지금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념 논쟁이 극단으로 치닫는 것은 잔혹한 역사적 경험이 아직 사람들의 기억 혹은 잠재의식 속에 남아있고, 그 상흔과 분노를 자극해 정치적 이득을 보려는 사람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딸아이는 자기 증조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 이탈리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처럼, 삶은 때로 처참하지만, 그 사실을 아이들에게까지 굳이 이야기해 줄 필요는 없다. 충돌과 갈등을 직간접적으로 목격한 세대라면, 혐오와 갈등 속에서도 묵묵히 이해와 평화를 지향하며 살아갈 책무와 소명을 질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