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연구소·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 심포지엄 개최
100년 전인 1926년 10월 28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중국인 주교 6명이 탄생했다. 후뤄산(胡若山)·자오화이이(趙懷義)·주카이민(朱開敏)·청허더(成和德)·쑨더전(孫德禎)·천궈디(陳國砥) 신부가 비오 11세 교황에게 주교품을 받은 것이다. 1685년 남경(南京)대목구장 나문조(羅文藻) 주교가 주교품을 받은 지 241년 만이었다.
후뤄산·자오화이이·주카이민·천궈디 주교는 각각 태주(台州)·선화(宣化)·해문(海門)·분양(汾陽)대목구장이었으며, 청허더와 쑨더전 주교는 포기(蒲圻)·여현(蠡縣)지목구장이었다. 이들 6개 개별 교회는 중국 북부와 남부에 3곳씩 설치됐다. 이는 서양 선교사 중심의 중국교회가 현지인 성직자에게 사목과 운영을 맡기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전환점이었다. 이후 일본·베트남·한국에서도 현지인 주교가 탄생하면서 아시아 교회 현지화의 흐름이 이어졌다.
이를 기념해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조한건 신부)와 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회장 신의식 교수)는 10월 24일 서울 중구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제3회 국제심포지엄 ‘중국 6위 주교 축성 100주년 기념 중국천주교 현지화’를 공동 개최했다.
신의식(멜키오르, 충북보건과학대학교) 교수는 1926년 중국인 주교 6명의 탄생이 교황청 선교정책 변화와 현지화 노력의 결실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초대 주중국 교황 사절 첼소 코스탄티니(1876~1958) 대주교가 중국인 성직자 양성과 주교 임명, 외국 정치세력으로부터의 교회 자율성 확보에 힘썼다고 강조했다.
신 교수는 19세기 중국에서 천주교가 서구 열강, 특히 선교 보호권을 앞세운 프랑스와 얽히면서 외국 종교로 인식됐다고 지적했다. 이에 베네딕토 15세 교황은 1919년 교서 「가장 위대한 임무」(Maximum Illud)를 통해 선교와 특정 국가의 이익을 분리하고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하도록 촉구했다. 비오 11세 교황도 1926년 회칙 「선교에 관한 일들」(Rerum Ecclesiae)에서 현지인 성직자가 민족의 교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1922년 중국에 파견된 코스탄티니 대주교는 1924년 중국 각지 주교들이 참석한 상하이 제1차 중국교무회의를 주관하고, 중국인에게 개별 교회의 책임을 맡기는 정책을 추진했다. 여섯 주교 후보자를 로마로 직접 인솔했으며, 중국 전통 예술·건축양식의 수용도 장려했다. 신 교수는 이를 보편 교회와의 친교를 유지하면서 중국 교회의 주체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으로 평가했다.
중국 안양사범대학교 류즈칭(刘志庆) 교수는 중국인 관할 개별 교회 설립의 성과와 난관을 분석했다. 1923년 설립된 포기지목구의 관할 예정 지역에는 본당 한 곳과 중국인 신부 한 명, 신자 729명뿐이었다. 외국 선교사들의 반발 속에 한커우대목구의 중국인 신부 23명 가운데 포기로 자원한 사람은 청허더를 포함해 8명에 불과했다. 류 교수는 그럼에도 포기지목구 설립의 “상징적 의의는 실질적 가치를 훨씬 뛰어넘는다”고 평가했다.
류 교수는 기존 외국 선교회 관할 대목구를 중국인에게 이양한 사례도 소개했다. 1930년 교황청은 프랑스 라자로회의 보정(保定)대목구 관할권 이양을 승인했고, 이듬해 저우지스(周濟世) 신부가 대목구장에 임명돼 주교품을 받았다.
류 교수는 이를 현지화의 새로운 길을 연 사례로 평가했다. 그러면서 1926~1949년 중국인 사제는 1272명에서 2785명으로, 전체 사제 중 비중은 41.99에서 51.11로 늘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1949년까지 중국인 관할을 위해 별도로 설립된 개별 교회는 24곳에 그쳤다. 현지화의 성과만큼 한계도 뚜렷했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