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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월간 꿈CUM] 영혼 그리고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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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빈 카푸친성당 피에타


이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차가운 것이 닿을 때마다 몸 한 쪽이 저릿할 정도의 고통이 느껴집니다. 뜨거운 것이 닿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치과 가는 게 성가시게 느껴져서 애써 참아보다가 이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꾸준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근처 병원에 가서 신경치료를 시작했습니다. 치료 첫날 마취를 하고 신경을 제거하고 나니 비로소 고통이 잦아들었습니다.

고통은 우리가 가장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하는 수단입니다. 사람은 힘들고 아픈 것을 잘 느낍니다. 그래서 애써 그것을 피하고 벗어나려고 하지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라는 말도 사실 같은 내용입니다. 인간은 고통이 다가오면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그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한껏 애를 쓰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움직이는 원리도 바로 이 고통에서 기인합니다. 즉, 세상 사람들은 고통에서 최대한 멀리, 그리고 누릴 수 있는 현세적 행복을 최대한 얻고자 애를 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세상은 더 많은 고통의 여지를 선물합니다. 예를 들어 조금 더 편하고 행복해지려고 차를 사고 나면 그 차 때문에 또 신경써야 하는 일들이 산더미처럼 몰려오는 셈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신앙을 찾게 되는 계기 중의 하나도 바로 고통입니다. 

물론 신앙이 좋아 보여서 끌려서 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지 않은 경우는 세상에서 큰 고통을 당하고 나서 그 해결책을 찾다가 찾다가 결국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통은 어찌보면 우리를 영원으로 초대하는 훌륭한 안내자와도 같습니다.

다만 우리 신앙 안에서 고통이라는 것은 세상의 고통과 조금 결을 달리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십자가 때문입니다. 

세상은 결국 고통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지만 우리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영혼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오히려 지상의 고통을 감내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모든 고통을 싹 다 없애주겠노라고 약속하신 게 아니라 오히려 당신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에 세상에서 겪는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되고 십자가의 가치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해서 죽기 직전까지 고통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고통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바는 고통을 싹 다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니고 있는 고통의 의미를 깨닫고 그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고통은 죄에서 기인합니다. 즉, 원래는 필요없는 고통인데 나의 죄로 인해서 내가 겪게 되는 고통입니다. 예를 들어 담배를 피우면 폐가 아프게 

될 것입니다. 이는 나의 흡연이라는 악습에서 비롯되는 고통입니다. 이 고통을 없애고자 한다면 담배를 끊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악습에서 기인하는 고통들, 나의 죄악에서 기인하는 고통들은 ‘회개’를 통해서 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종류의 고통들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다만 세상이 돌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고통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점점 늙어가고 신체 기능이 떨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이는 우리가 끌어안고 받아들여야 하며 또 나아가서 타인을 도와주기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의 미숙함을 돌보아 주어야 하고 또 어르신들의 부족함도 보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뜻하지 않은 자연재해를 겪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서로 연대하고 보살펴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의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십자가의 고통’이라고 부릅니다. 아무 죄도 없는데 아무 이유도 없는데 한 사람이 고통을 겪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통해 원래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이들이 용서받고 고통이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고통이고 십자가의 고통이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바로 이 고통을 자발적으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셨고 그로 인해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고 계십니다. 우리가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형식적인 신앙의 요식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본받아 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다는 의미입니다. 


글 _ 마진우 신부 (요셉, 대구대교구 초전본당 주임)
2005년 서품. 남미 볼리비아 동부 산타크루즈에서 선교했으며, 현재 유튜브 ‘겸손기도 신부’(@semitoon)와 블로그(https://semitoon.blogspot.com)를 통해 세상에 말씀을 전하고 있다. 평화방송 TV ‘겸손기도 신부의 와서 보시오’에 출연해 주목받았으며, 에세이집 「아무것도 없었지만 모든 것이 있었다」, 교리서 「포근한 가정 교리서」, 만화책 「SEMITOON」 「PRIESTOON」을 펴냈다. 뼛속 깊이 선교사인 사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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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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